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맞짱 토론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리고 장애인들이 이동권과 예산을 요구하는 시위에 대한 경험에 따라 시민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뉘었지만, 한국에서 장애인 문제가 최초로 단일 의제로 정치적 이슈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두 토론자의 눈높이를 똑같이 맞추지 않은 채 자리를 배치한 방송사 등 한국의 주류 사회가 소수자 문제를 정교하게 다루는 데 얼마나 허술한지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과 개선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맞짱 토론을 앞두고 많은 언론이 특별 지면을 할애해서 심층 보도를 했다. 이 중 <한겨레21> 제1408호의 표지(사진)는 진보 언론이 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표지 사진은 휠체어에 탄 박경석 대표가 어두운 계단을 뒤로하여 약간 구부정하게 정면을 응시한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갈겨쓴 글씨체로 ‘오늘도 박경석은’이라는 문구가 달려 있다.
현대사회의 기호를 이데올로기 담지체로서 분석한 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론을 적용하기에도 손색없다. 1차적으로 사진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동권 문제다. 어두운 계단에 가로막혀 장애인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사다리꼴로 앞을 완전히 가로막는 어두운 계단을 뒤로하여 박경석은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빛과 무표정해 보이는 시선, 약간 남루한 옷차림은 항의하는 것인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막막함을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등장인물의 강인함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막막함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 장면은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와 대비된다. 에베레스트산이나 K2를 등반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고고한 사람>이라는 일본 만화의 한 컷에 잘 드러나 있다. 거대한 산이 앞을 가로막고 등반을 앞둔 사람은 그 산을 바라보고 있다. 독자는 화면을 꽉 채우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산과 대비를 이루는 아주 작은 크기의 주인공 뒷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의 굳은 의지가 문구로 달려 있다. “살아 있는 한 정상을 향하는 거야.” 이 말과 함께 화면에는 작게 그려졌지만 사람의 의지가 압도적인 산을 압도한다. 인간 정신의 크기가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 인간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그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한다.
반면 그의 곤궁함을 강조할 때는 ‘피해자’ 됨을 강조한다. 20여 년 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문제를 다룰 때 감염인의 사회적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포스터들이 그랬다. 감염인이 거울을 보고 등지고 서 있다.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반쪽 정도만 보여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얼굴을 보여줄 수 없는 감염인, 거울에 비친 얼굴도 자기만 볼 수 있는 감염인의 사회적 고립 상태, 다르게 말하면 사회가 그를 어떻게 외면하는지를 부각한다. 이렇게 되면 그의 정신 크기가 부각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상황이 부각된다. 당연히 이름은 부여될 수 없다.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의 이번 표지는 이 두 모습과 대비되며 소수자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표지 사진 자체는 계단에 막힌 등장인물의 굳건한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정신 크기가 강조되지 않으니 그의 이름이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막막하고 곤궁한 사회적 상황이 강조되지도 않았다. 그의 피해자 됨이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피해자/약자’라는 것에 등장인물이 완전히 용해되지도 않았다.
대신 표지에는 ‘오늘도 박경석은’이라는 문구가 달려 있다. 이 문구와 함께 이 표지는 두 번째 의미를 가진다. ‘오늘도’라는 말은 이런 상황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가 날마다 이런 상황을 마주 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매일 그 앞에서 항의하며 싸운다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열려 있다. 여기에 ‘박경석은’이라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이 문구와 함께 이 표지는 장애인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윤리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이준석 대표와 맞짱 토론을 하는 ‘박경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한국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사람들은 이 토론을 ①국민의힘 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②이준석 대 박경석 ③이준석 대 장애인 단체 대표, 크게 봐서 이 셋 중 어떤 대결로 인식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세 번째 구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쪽에는 개인의 이름이, 다른 한쪽에는 단체 혹은 소수자 ‘집단’의 이름이 있다. 단지 박경석이 유명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한겨레21> 표지가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윤리를 보여줬다는 점은 이 대결 구도에서 집단에 있는 한쪽의 이름을 개인의 이름으로 돌려줬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모험이 개입했을 것이다. ‘박경석’이란 이름을 강조하는 것으로 얻는 실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만으로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그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준석’은 그 이름만으로 선명하게 부각하는 게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따라서 문제를 부각하는 데 크게 실익이 없는 제목이다. 언론으로서 주제를 부각하는 실익을 ‘희생’하면서 이 표지는 박경석에게 이름을 돌려줬다.
지난 칼럼에서 소수자의 반대 항에 있는 것은 다수자나 기득권이 아니라 ‘개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소수자가 자신이 소수자임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소수자임이 드러났을 때 받는 억압이나 탄압 때문만은 아니다. 소수자들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소수자로 인식될 때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소수자’라는 말이 블랙홀처럼 흡수해버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수자 특유의 감각’ 따위로 찬사라고 늘어놓는 것이든, ‘소수자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피해의식’ 운운하는 것이든 말이다. 비겁해서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소수자운동을 하는 이는 자기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견뎌내는 사람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민중의례’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첫 구절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 이름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운동의 시작이다. 이 경향이 유독 강하며 심지어 ‘자연화’된 게 소수자운동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소수자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이란 ‘집단’을 떠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데 소수자는 집단을 본성화한 ‘정체성’을 떠나기 극히 어려운 사람들이다.
자신의 집단/정체성을 떠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근대사회가 소수자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혐오’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에서 사람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개인으로 존재해야 한다. 개인은 그냥 혼자 존재한다고 해서 개인이 아니다. 그는 낱개로서의 개체에 불과하다. 홀로 있다고 해서 개인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개인이 된다. 그렇기에 일체의 집단/정체성에 저항하며 벗어나려 할 때(비록 이후에는 그 정체성으로 회귀하더라도) 비로소 개인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관용>에서 근대사회가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이 개인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집단에 머무르는/종속된 사람이냐는 점이라고 말했다. 즉 서구인이 보기에 이슬람교도는 자기 의견을 가지기보다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종속돼 맹목적으로 그 정체성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존재는 정체성에 반해 자기 이름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포기하고 정체성을 따른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이 혐오에는 좀더 근본적인 차원이 있다. 일체의 집단과 정체성에 맞서 자기 이름을 지키는 것, 그것이 자유의지이며 그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자유인이다. 이들이 보기에 정체성을 따르는 이는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다. 어떤 가치보다 중요한 ‘자유’를 포기했기에 이들은 문명인이 아니며 문명인과 결코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이들의 자유는 기껏해야 ‘관용’될 뿐이라는 것이 웬디 브라운의 통찰이다. 사실 관용이란 그의 말처럼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유발하는 혐오를 참는 것일 뿐이다. 그게 비문명인을 대하는 문명인의 교양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겨레21> 제1408호 표지는 장애인 활동가 박경석의 ‘정신의 크기’를 강조하는 것도, 장애인으로서 곤궁한 사회적 상황을 부각하는 것도 아닌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 덕분에 독자 역시 장애인 ‘문제’를 차이가 유발하는 혐오를 참는 관용의 방식으로 대하는 ‘문명인’의 태도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박경석이란 이름과 함께 그의 일상을 마주 대함으로써 ‘오늘도’ 저이는 무엇을 하고 왜 저러한가 그의 삶을 궁금해하고 박경석이 누구인지 알고 싶게 했다. 지난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그를 자기 이름을 가진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좁은 길이 열린 것이다.
장벽인가, 길을 알려주는 별자리인가앞에서 언급한 <고고한 사람>에 주인공 모리가 등반하면서 자기가 가야 할 산을 보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모리는 자신을 가로막는 산에 별자리처럼 길이 빛나는 것을 본다. 더 이상 자기를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며 그 길을 알려주는 별자리이다. 언제쯤 박경석 뒤에 어둡게 장벽처럼 쳐져 있는 저 계단에 모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길이 되는 별자리가 빛을 낼까. 그날까지 ‘오늘도 박경석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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