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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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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의 횃불’ 든 사람들의 자유란

자유를 꿈꾸는 창작자들과 ‘좋은 삶’으로 이끄는 ‘자유’
등록 2022-01-16 07:06 수정 2022-01-19 01:47
2022년 1월8일 국민의힘이 공개한 윤석열 대선 후보의 장보기 사진.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멸치’ ‘#콩’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멸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제공

2022년 1월8일 국민의힘이 공개한 윤석열 대선 후보의 장보기 사진.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멸치’ ‘#콩’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멸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제공

군가가 힘차게 울려퍼지고 있다. 멸공의 횃불이다. 왜 뜬금없이 ‘멸공’일까? 과체중으로 군대를 면제받았지만 멸공의 횃불을 높이 든 분의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3만1천원 버거를 먹고 자유를 누렸다면서 자신에게 “자유란 무슨 의미이고 가치일까?”를 되물었다. 이 글을 볼 때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자유’이며 멸하자는 것은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듯하다. 시민의 권리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전체주의는 좌와 우를 가르지 않고 나타난다. 소련 공산주의만큼이나 억압하는 극우 파시즘도 있다. 그래서 아마 “좌우 없이 사이좋게 멸공”을 외치자고 말한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 ‘우’의 전체주의는 쏙 빼놓고 말이다.

자기 삶의 숙제가 된 숙명에서의 자유

그리스 시대 이후로 ‘자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다. 그러나 자유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횃불을 든 분의 말에서도 자유의 의미가 언제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인지, 아니면 비싼 것을 비난받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멸공’을 자유롭게 말할 ‘표현의 자유’까지 더해졌다. 국가권력의 법적·제도적 감시와 억압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눈치 보지 않을 자유까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자유다.

전자는 명확하지만 후자의 자유는 까다롭다. 보수의 자유 담론은 반공에서 알 수 있듯 낡았고 진보의 자유 담론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누구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방종이라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 되어 산에서 홀로 발가벗고 뛰는 것은 최상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근대사회에서 말하는 자유는 아니다. 거기에는 타자(남)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만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 특히 2030세대에게 자유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더 진보된 자유 담론으로 다가서야 한다.

나는 이번 대선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자유의 문제를 제대로 다뤘으면 좋겠다. 우파는 자유이고 진보/좌파는 평등이 아니다. 우파가 그려놓은 것처럼 자유 vs ‘뫄뫄’(‘뭐뭐’라는 뜻의 인터넷 용어)라는 말에 말리면 안 된다. 진보/좌파도 평등을 통한 자유를 말한다. 우파가 말하는 자유는 어떤 자유이고 진보/좌파가 말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이며 그 자유는 시민들을 ‘좋은 삶’으로 이끌지를 토론했으면 좋겠다. 자유 담론이 없다면 그건 결코 시민들을 ‘좋은 삶’으로 이끌지 못한다. 정치로서 실격이다.

내가 가르치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도 자유는 필수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하다. 그런데 창작자로서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알게 됐다. 자기 삶의 문제로부터의 자유다. 인간은 누구나 숙명이 되어버린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때로 폭력의 경험이기도 하고, 때로 사랑과 배신의 아픔이기도 하다. 자기 삶에 가장 깊이 박힌 상처, 자기 삶의 숙제가 돼버린 그 상처에 매여버리면 창작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자기에 대한 연민과 원한에 빠지면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일기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와 함께 이 문제를 씨름하는 한 학생이 대표적이다. 그는 그림 그리는 실력이 뛰어나다. 그저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이 이미 구축돼 있다. 그 학생의 그림이 다른 그림들 사이에 놓여 있더라도 그의 스타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다. 콘티를 짜는 실력이 유려하다. 어떤 콘텐츠를 가져다주고 그림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라고 해도 막힘없이 잘한다. 그에 더해 상상력도 좋다. 어떤 주제를 주고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보라고 하면 다큐멘터리와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런데 이 학생이 독자적인 자기 콘텐츠,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항상 일기에서 이야기로 가는 결정적인 문턱을 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연민과 타자에 대한 미움 등 감정이 정제되지 않는다. 설명이 장황해지거나 주인공과 작가, 그리고 작중의 내레이터가 뒤섞인다. 오랫동안 그 학생과 왜 그런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웹툰 <단지>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화면 갈무리

웹툰 <단지>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화면 갈무리

작품이 되는 일기, 작품이 안 되는 일기

사실 근대에는 일기가 다른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좋은 작품이 된 사례가 많다. 일기는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일기는 개인의 내면을 읽게 하는 탁월한 양식이다. 단, 작품 반열에 오른 일기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 내면의 세계에서 충분히 자신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반대로 작품이 되지 못한 일기란 자신을 충분히 자기로부터 떼어놓지 못한 이야기다. 특히 자신에 대한 감정, 연민이 정리되지 못했을 때 이런 작품은 판타지이건 역사물이건 어떤 형식을 취해도 그저 감정을 토해내거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일기에 그치고 만다.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자기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게 장르를 가르지 않고 왜 일기가 되는 것일까? 숙명처럼 만들어진 자기 삶의 숙제를 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그것이 어떤 장르에서 어떤 이야기로 풀어지건 그 장면만 나오면 자기 감정이 먼저 터져나와버린다. 여러 기술적인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삶의 숙제가 가장 큰 장벽이 되어 독자적인 세계를 제시하는 작가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다.

여기 사례로 든 학생의 경우 그의 숙명적 숙제는 가족이다. 아주 명시적인 가정 ‘폭력’이나 ‘학대’까지는 아니지만 그는 성장 과정에서 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불안과 죄책감을 동시에 떠맡았다. 한편에는 자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돌볼 것을 요구하는 어머니로부터 떠나고 싶다는 마음, 다른 한편에는 그 어머니를 떠나고 싶어 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그때마다 마음을 고쳐먹고 어머니와 화해하고 싶지만 도저히 화해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불화와 좌절,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지긋지긋함과 죄책감을 반복한다. 학생 스스로가 말한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야지만 그다음에 어떤 이야기든 제 상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그의 역량과 상상력은 탁월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 삶의 숙제에서 자유로워져야 다음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다. 이야기가 힘껏 도약하다가도 이 숙제에 발목 잡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해버린다.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지 못한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 학생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죽이는 이야기’의 근본은 재능이라기보다 ‘자유’라는 것을 말이다.

웹툰 <남남>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화면 갈무리

웹툰 <남남>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화면 갈무리

재능의 한계에 가보기 전에 만나는 벽

이 학생뿐만이 아니다. 다른 학생들, 아니 인간 모두가 대부분 풀어내지 못하고 매인 숙명 같은 숙제가 있다. 문제는 무엇이 자기 삶의 심연에 있는 숙제인지, 이것을 어떻게 대면하고 풀어야 하는지 배워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재능이 탁월하건 그렇지 않건, 대부분 학생이 자기 삶의 문제에 막혀 재능의 한계에 가보지도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이 삶의 문제는 놀랄 정도로 닮았다. 가족이다. 자기들이 기획하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무서울 정도로 한국 가족의 암흑이 나타났다. 명시적인 학대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애완’의 폭력에 이르기까지, 성공을 향한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부터 아예 재능이 없는 존재로 일찌감치 낙인찍고 방치하는 데 이르기까지. 한국의 가족은 ‘가족’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문제는 이것이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이 가족과 제대로 불화할 수 없다. 윤리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 타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서 절대 이 가족과 불화하는 것으로, 문제의 근원으로 다가설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한다면 세계와 불화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와 불화할 수 없으니 당연히 자기와의 화해로 치열하게 나아갈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와 화해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자기와 화해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에서 작품이 나온다. 가족 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웹툰 <단지>나 <남남> 같은 작품이 해냈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은 자기와 화해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계에 대한 ‘원망’으로 점철된다. 자기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에 의한 불쌍한 ‘피해자’로서 ‘악’만 쓰게 된다.

자기와의 화해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교육의 핵심적인 존재 이유다. 나아가 자기와 화해한 사람만이 세계를 돌볼 수 있다. 교육은 사람이 자신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숙제를 대면하게 하고 그 문제를 풀면서 자기와 화해하며 세계를 보좌하는 자유로운 주체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한국 교육이 그렇게 좋아하는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교육의 목적은 자유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자기의 숙명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상실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난다. 자유를 오로지 타자에 대한 지배로 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 중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은 타자와 세계를 향해 불장난한다. 이들에게는 세계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적과 나 사이의 전쟁 같은 ‘게임’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다루고 소모하는 게임의 말, 그것도 ‘졸’로 여긴다.

세상과 남을 죽이는 이야기

자기와 화해하려는 것이 중심에 있지 않으면 ‘뛰어난 재능’이야말로 자신만이 아니라 세계를 위태롭게 한다. ‘죽이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과 남을 죽이게 된다. 정치의 목적은 상실한 채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온갖 술수만 부리면서 난장판이 돼가는 작금의 정치판처럼 말이다.

이런 세상일수록 자기와 화해하려 고군분투하며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세계를 보좌하려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행히 학생들은 주저앉지 않고 있다. 비겁한 정치인들처럼 세상에 불 지르는 것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용기 내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대면하려 한다. 그 대면의 상처를 감당하려 한다. 조금씩 ‘죽이는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다. 학생들은 ‘좋은 삶’을 위해 이 ‘자유’에 목숨을 걸고 있다. 횃불을 높이 든 당신들의 자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걸고 있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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