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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된 이들이 함께 걸었다

고 정병호 선생의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송환’의 기록
등록 2025-12-11 22:49 수정 2025-12-19 10:42
1997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외곽에서 유해발굴을 하는 모습. 이때부터 홋카이도 유해발굴은 거의 해마다 열리면서 동아시아 평화의 깃발이 휘날리는 양국 만남의 장으로 승화되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1997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외곽에서 유해발굴을 하는 모습. 이때부터 홋카이도 유해발굴은 거의 해마다 열리면서 동아시아 평화의 깃발이 휘날리는 양국 만남의 장으로 승화되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좁고 야트막한 구덩이 속에 관도 없이 쪼그린 자세로 꺾여 들어가 있는 주검. 두개골 파열의 흔적이 역력한 주검. 나무뿌리에 뒤엉킨 채 지나간 세월 속에 삭아버린 뼈마디”. 1997년 7월, 유골 네 구가 출토됐다. 일본 혹한의 땅 홋카이도 지방 슈마리나이 인공호수 인근, 일본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향해 가던 때인 1938~1943년 댐 공사가 이뤄지던 현장이었다.

일본 하층 노동자의 것인지,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유골들이 참담한 형태로 발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현장에는 2025년 오늘은 상상하기 힘든 조합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가해와 피해의 서사가 ‘연루’된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 젊은이들, 민단 계열부터 총련계, 조선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재일동포 참가자까지 200여 명이 함께 삽을 들었다. 이 발굴 프로젝트가 처음 성사되기까지 예상치 못한 연대와 서로에 대한 오해와 긴장, 또 그것을 풀어내는 마음을 맞댄 공부가 있었다.

인류학자 고 정병호 한양대 교수의 글과 구술을 엮은 ‘긴 잠에서 깨다’(푸른숲 펴냄)에는 긴장과 감동이 함께 서려 있었던 여덟 차례에 걸친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과 이때 발굴된 115구의 유골을 ‘70년 만의 귀향’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2015년 한국으로 송환하기까지 3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의 학자, 활동가가 함께 걸어온 ‘평화의 걸음들’이 기록돼 있다.


‘평화의 기록’ 시작은 어린이집이었다. 정병호 선생이 1989년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 어린이집 현장 연구를 진행하다 아이들을 진흙에서 맨발로 놀리며 자유롭고 진보적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을 만났다. 도노히라는 서울 신림동에서 ‘해송아기둥지’라는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을 설립해 ‘운명을 바꾸는 교육’을 꿈꾸고 실행하는 실천인류학자였던 정병호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당한 홋카이도 아이누족의 역사와 강제동원 조선인의 역사를 발굴하고 거기 묻은 흙을 털어내는 길도 함께 가자고 손짓했다.

한국·일본 국적을 따지기보다 동아시아인으로서 모두가 침략의 역사에 ‘연루돼 있다’는 감각으로 정병호와 도노히라는 유골을 발굴한 뒤 그 유골의 가족을 찾아주고 함께 기억하는 길을 일궈왔다. 이들의 실천은 혐오와 힐난과 이익만으로 얼룩진 지금의 동아시아 외교를 떠올리면 이상향에 가깝기에 더욱 값지다. 280쪽, 2만3천원.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자본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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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바깥

김지음·빈고 지음, 힐데와소피 펴냄, 2만2천원

자본수익을 사양하는 출자자, 이용자, 운영자가 모인 은행이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자본수익은 고스란히 ‘공유지’의 성격으로 전환될 것이다. 공유자들은 공유지를 서로를 위해, 또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도 쓸 것이다. 이는 가설이 아니라 실증된 사례다. 16년간 540여 명이 참여해 탈자본 금융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커먼즈(공유)은행 ‘빈고’의 놀라운 이야기다.

 

저속 성장 육아 일기

저속 성장 육아 일기


저속 성장 육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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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우리 아이는 자폐가 있어요”라 말하게 된 엄마의 에세이. ‘정상’에 맞추려는 싸움을 멈추고 ‘받아들임’ 대신 ‘적응’을 선택한 마음의 변화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한때는 로건이의 장애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꼈지만 그 우물 밖으로 나를 꺼내준 것도,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준 것도 전부 로건이었다.” 아이의 성장 기록이자 엄마의 성장 기록인 셈이다.


인도네시아, Etc.

엘리자베스 피사니 지음, 박소현 옮김, 눌민 펴냄, 3만2천원

인도네시아 특파원, 의료 인구학자 등으로 활동한 저자가 쓴 ‘남들 가는 대로 안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인도네시아 여행기’. 저자는 ‘보도라는 폭압’에서 벗어날 기회만 생기면 주민, 분리주의 반군, 불법 금광업자, 정치범 등을 만나며 곳곳을 탐험했다. 식민주의자들이 멋대로 그은 국경에서 719가지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360여 종족의 나라를 조명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성수연 인터뷰, 김신중 사진, 북트리거 펴냄, 3만2천원

배우이자 창작자 성수연이 무대 위아래서 함께한 동료들을 인터뷰했다. 예를 들어 배우 경지은은 연극 ‘레드 스피도’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 수영선수를 연기한 경험을 말한다. 자신의 타고난 모습이 사회적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기에 ‘성별에 따른 억압과 편견’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연기한다. 배우·연출가·무대감독·수어통역사·관객 등 스물한 명의 예술과 노동, 신념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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