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꽃이 비에 맞아 떨어진 건지, 피어나긴 했지만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떨어져 내린 건지 알 수 없다. 인생에 대한 비유로 느껴지는 나무가 마침내 강한 천둥에 쪼개져 넘어졌을 때 이야기도 끝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염탐한다. 인물들의 인생은 더럽고 기괴한 이미지 속에 꽃잎이 흐드러지듯 어지럽게 교차한다. 주인공 여자 쉬루화는 옆집 남자 겅산우를 훔쳐보고, 이웃 겅산우의 아내는 거울을 매달아 쉬루화를 훔쳐본다. 쉬루화의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쉬루화를 훔쳐보고, 겅산우의 장인과 사무실 사람들과 동네 할아버지는 겅산우를 훔쳐본다. 옆집에 사는 쉬루화와 겅산우는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소리를 듣는다.
세상 전체가 서로를 훔쳐보는 이미지는 기괴하고 몽환적으로 그려진다. 감시자인 ‘쥐의 두 눈이 인물의 좁은 등 위에 멈춰’ 있다거나, 화장실에 가 용변을 볼 때면 ‘갈라진 문틈으로 한쪽 눈을 들이밀고’ 누군가 쳐다본다거나 하는 식이다. 언어가 그려내는 소리 혹은 무음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감시의 시선에 불안감을 더한다. 쉬루화는 자꾸만 오이 초절임을 조용히 씹고 남편이 먹으라 권한 누에콩도 씹는다. 겅산우의 아내는 자꾸만 갈비찜을 끓여 고기를 뜯는다.
‘찬쉐의 소설 중 가장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오래된 뜬구름’(열린책들 펴냄) 속에서 뒤틀린 형상들은 삶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중학교 교사였던 라오쾅과 결혼한 쉬루화는 한때 아이를 가지고 싶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라오쾅과 그의 어머니(시어머니)는 ‘무슨 일을 대할 때마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사람들’이었고, 여자는 한때 아이를 품고 싶었던 자신의 배가 사실 그냥 ‘가죽 안에 더러운 창자와 뭔가 귀신들이나 알 만한 것들이 들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인의 어록을 중시하며 끊임없이 아들 라오쾅을 통제하는 시어머니, 아내에게 자꾸만 살충제를 뿌리라고 권하는 라오쾅은 결국 쉬루화를 떠난다. 그들은 결국 쉬루화가 ‘미친 여자’였음을, ‘쥐’였음을 서로에게 되새긴다. 그사이 쉬루화의 몸 안은 점점 더 건조한, 불이 붙을 정도로 마른 갈대로 가득 찬다.
겅산우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며 ‘나도 한땐 무엇이었다’, 혹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위의 생각을 한다. 그는 바지에 똥을 싸는 동네 영감을 비웃는 아내에게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필사적으로 자신과 누군가를 구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자신들이 폭로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배우자들과 같은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쉬루화와 겅산우는 한때 몸을 섞지만 끝내 서로에게 무언가가 되진 못한다.
김태성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찬쉐가 “이미지 서사와 극단적 부조리 서사로 독자들을 상대로 상상력 테스트를 하고 있다”고 썼다. 독자와 작품 사이에 평론가들이 하는 해석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실험적 문체와 구조라는 평이다. 1953년 후난성 창사시에서 태어난 찬쉐와 그의 가족은 극단적 감시와 비이성의 시대를 살았다. 이에 찬쉐의 작품을 문화대혁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인물들을 쫓아다니는 시선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 독자에게도 충분히 유효하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찬쉐가 왜 ‘중국의 카프카’라고 불리는지 궁금한 독자에게 권하는 책이다. 192쪽, 1만5800원.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당신의 상처는 사적이지 않다
정찬영 지음, 잠비 펴냄, 2만2천원
12·3 내란 사태는 광주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헤집어놓았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자행한 무자비한 고문과 성폭력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군부의 폭력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는가. 우리 사회는 이미 과거를 통해 그 결과를 봤다. 책은 그 시간을 통과한 이들의 삶을 자세히 다룬다. 피해자가 외상적 수치심과 산 자의 죄책감, 도덕적 손상 등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엄마만 남은 김미자
김중미 지음, 사계절 펴냄, 1만9천원
‘괭이부리말 아이들’ ‘곁에 있다는 것’ 등을 통해 빈곤의 구조적 문제를 펼쳐 보인 작가가 처음으로 자신의 내밀한 가족사를 들려준다. 중증 인지장애로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김미자는 가난보다 고립을 더욱 못 견뎌 했다. 어쩌면 엄마의 장애는 가부장의 굴레에 얽매여 외롭고 고된 삶을 살며 얻은 가슴 아픈 유산인 것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책은 엄마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주변부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펴냄, 2만3천원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진실이야.” 리영희 선생 타계(2010년) 15주기를 맞아 리영희재단이 2022년부터 발간한 뉴스레터 속 글을 모아 책을 엮었다. 여러 작가와 학자가 저마다의 관심과 관점으로 리영희 선생의 모습을 점묘화처럼 드러낸다.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말하는 사람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사라져가는 요즘 시대. 리영희 선생이 가르친 ‘생각하는 법’을 다시 돌아볼 때가 아닐까.

우주의 먼지로부터
앨런 타운센드 지음,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펴냄, 1만8천원
‘살아 있는 것들은 죽으면서 지구의 우주먼지를 주고받을 뿐 아니라 바위, 물, 공기, 조개껍데기, 석탄, 이산화탄소 배기가스에 그 우주먼지가 스며들게 한다.’ 과학자로서의 성취, 가족의 행복을 만끽하던 한 남자에게 어느 날 비보가 날아든다. 네 살배기 딸과 생물학자인 아내가 1년 사이 둘 다 뇌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상실의 시기를 건너는 과학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 과학이 숫자가 아닌 인간에 기반한 활동일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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