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으려고 애썼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면 젊을 때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시는 체험이다.”(<말테의 수기>) 무엇을 체험해야 하나. 친절하게도 릴케는, 아침에 작은 꽃이 피어나는 몸짓, 기이하게 시작되는 어린 시절의 병들, 진통하는 여자들의 비명 등을 이야기해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이런 것.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죽은 사람 곁에 그리고 치미는 흐느낌 곁에 있어보았어야 한다.”
‘감정’을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것이 시가 아닌 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시는 곧 ‘체험’이라고 단정해도 될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기구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온다고 할 수밖에 없겠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10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그래서 시가 품고 있는 체험의 힘과 시(언어) 자체의 힘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네. 예컨대 안현미의 첫 번째 시집 <곰곰>(랜덤하우스중앙·2006)은 어떤 경우였을까? 요즘 젊은 시인들은 대개 체험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지. 그런데 이 시인은 달랐네. 시집을 읽고 알게 됐지.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여상을 졸업하고, 홀로 상경해 아현동 옥탑방에 짐을 풀고, 배고픔이나 외로움 때문에 뒤척이다가, 어떤 날에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거짓말을 타전하다’에서)던 한 여자의 삶. 그런데 이게 장점이기만 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네. 물론 이런 시 앞에서는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없었지만.
“12개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녹슨 열쇠구멍 속에 갇혀 있는 내가 있지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분열을 앓고 있는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하지 증오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는 녹슨 가위를 들고 동맥을 오리지 피 흘리는 나를 안아주는 나는 당신이 선물한 액자 속에 있는 당신이 사랑한 삭발한 여자에게 말해주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도 아니었지 그냥 지상에서 가장 높은 방에 서로를 모셔두는 일이었지 그래서 당신과 여자는 울지 못하고 옥탑방만 울고 있는 거지”(‘옥탑방’에서)
아현동 옥탑방 시절 한 남자를 사랑했었네. 그 남자 때문에 삭발을 했고 동맥을 자르기도 했었지. 이 체험만으로 버티고 있는 시일까. 아니지. ‘나’와 ‘당신’이 꼬리를 물고 주어와 목적어의 자리를 다투며 피 흘리는 문장들로 이 시는 버티고 있지.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하지 증오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는 (…) 당신이 사랑한 삭발한 여자에게 말해주지.” 사랑의 일에서는 그 무엇도 혼자서 하는 일이란 없으므로 사랑의 비극에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네. 비극을 자초한 한 사람과 비극을 완결한 다른 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 “당신과 여자는 울지 못하고 옥탑방만 울고 있는 거지.”
이런 좋은 시들이 있긴 했지만, 이 시집은 어딘가 위태로운 데가 있었지. 진실하고 힘있는 시들은 체험의 압력이 강해서인지 언어가 직설적이고, 체험의 흔적이 옅은 시들은 또 어쩐지 언어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3년 전 시집을 뒤늦게 거론하는 이유는 최근에 출간된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창비·2009)을 흔쾌하게 읽었기 때문. 최소한 ‘합체’나 ‘시간들’ 같은 좋은 시들에서는 이제 어떠한 위태로움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이 시집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면 몇 번 더 읽어봐야 하겠기에,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독자 여러분께 우선 추천부터 해드리려는 마음 때문. 그리고 덧붙여, 시에서 중요한 것은 구술사학이 아니라 전기공학이라는 말씀도,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드려보고 싶었기 때문.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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