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선배님께. 선배님, 내세에서 평안하십니까? 저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이 죽은 자들의 내세쯤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20주기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던 당신을 다시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요 며칠 동안만큼은, 당신은 확실히 내세를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런 식의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기형도의 시집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어느 해 대구 시내 모 입시학원 옆 서점에서였다.” 이것은 제 얘기입니다만, 남의 것까지 포함해서, 어쩐지 이런 회상들 앞에서 저는 심드렁해집니다.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극적인 삶에 끼어든 평범함이지 평범한 삶에 끼어든 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아우슈비츠 창살 너머의 들꽃이 감동적이지 어느 문학평론가의 평범한 삶에 끼어든 프리모 레비의 책이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기형도 시집과의 사적인 인연을 고백하는 모든 독자에게 무슨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인연은 소중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기형도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펴냄)를 훑어보니 선배님과 친분이 있었던 분들은 사후 20년 동안 탄생한 ‘각자의 기형도’들에게 어떤 이물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가 죽음을 예견했고 죽음이 시를 완성했다는 식의 ‘기형도 신화’가 그분들에게는 꽤나 당혹스러웠나 봅니다. 인간 기형도는 지극히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분들의 공통된 기억이니까요.
선배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형도의 죽음’과 ‘기형도 시집’을 확고부동한 결합체로 간주하면서 구축한 모든 신화는 제게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의 시가 제아무리 삶에 대한 비관으로 얼룩져 있어도 그것은 결국 시일 뿐입니다. 시인과 시는 생각만큼 그리 긴밀하지 않습니다. 시는 ‘제작하는’ 것입니다. 삶의 인간이 얼마든지 죽음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만 시가 시인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형도 시집’과 분리될 만큼 ‘인간 기형도’가 그토록 자명한지도 제게는 미심쩍습니다. 감히 말하거니와, 성격은 일종의 습관입니다. 어느새 피부가 돼버린 옷이지요. 누구나 자기에게 가장 편한 성격을 걸쳐 입습니다. 유쾌한 농담과 과장된 제스처가 어디 인간 기형도의 속살이겠습니까. 그러니 ‘기형도 시집’으로 ‘인간 기형도’의 본질을 짐작해보는 일은 독자의 권리입니다.
제 얘기가 모순처럼 들릴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 모순의 공간이 본래 시 독자의 놀이터입니다. 그 놀이터가 20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곳은 특히 젊은이들의 공간이었지요. 자세히 말할 여유가 없습니다만, 선배님의 많은 시들은, 극(劇)적으로 세팅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3인칭의 눈으로 기술되다가 돌연히 이루어지는 1인칭의 비장한 단언과 감성적 개입 덕분에 ‘옆으로 터지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미완의 비극이라고 할까요. 독자 편에서 시에 자기를 투사할 여지가 각별히 많다는 얘기입니다. 비극인데다, 미완이니까요.
그러니 선배님의 시가 품고 있는 ‘미완의 비극성’이 특히 우리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젊은이들이란 자신의 삶이 비극이라고 믿는 버릇을 갖고 있지만, 감히 그 비극을 완성할 용기는 갖고 있지 않은 치들이니까요. 이것은 기형도의 시가 갖고 있는 ‘보편성’에 대한 얘기입니다. 2009년에 다시 읽는 선배님의 시, 그 ‘특수성’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긴 편지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자, 우리의 기억 속에서 평안하십시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찰나의 행복을 영원이라 착각하고 사소한 고통을 지옥이라 과장하면서, 그렇게 “장님처럼 더듬거리며”(‘빈집’) 내내 살아갈 것입니다.
추신: 생전의 카프카는 그의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의 작품 중 ‘유효한’ 것은 을 포함한 단 여섯 편뿐인데, 자기가 죽고 나면 그마저도 모두 불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브로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명감 속에서, 미완성 원고와 사적인 편지까지 모두 출판했지요. 작가 밀란 쿤데라는 브로트를 격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 비판에 ‘동의’는 못하더라도 ‘공감’은 하는 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습작이나 초고가 공개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시집으로 묶기 위해 골라놓은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불태웠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유고 시집 이후 추가로 공개된 선배님의 작품을 지금까지도 꼼꼼히 읽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에게나 각자의 기형도를 가질 권리가 있으니까요.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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