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일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열심히 할 뿐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매력 없다. ‘왜 그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잘 정리된 몇 문장의 대답을 머뭇거림 없이 꺼내놓는 사람이 프로라고 생각한다.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시인들이 ‘왜 그런 시를 쓰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쓰는 글을 흔히 ‘시론’(詩論)이라고 한다. 그런 유의 글들을 보면서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려내는 작업은 비평가의 경박하고도 은밀한 오락이다. 야구에서는 어쩌다가 만루 홈런을 쳐내는 돌발 타자 말고 꾸준히 3할의 타율을 유지하는 선수가 프로라면, 시에서는 시론을 쓸 때 ‘시적으로’ 대충 뭉개지 않고 명석하게 단도직입하는 글을 써내는 이가 프로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글을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먼저 김중식 시인의 글.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겠다. 시는 적당적당(的當適當)히 가는 것이다. 끝까지 갔다가, 또는 끝까지 가려다 무서워서 되돌아 나오는 비겁의 자리가 시의 마음자리다. (중략) 시는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다. 시는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다음은 김행숙 시인의 글. “시는 글쓰기의 ‘사건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태 속에서 움직인다. ‘쓴다’라는 행위 이전에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사건은 벌어지는 것이며, 충돌하는 것이며, 의외의 방향으로 번지는 것이다. (중략) 낯선 것(새로운 것)을 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우리는 낯설어지고 새로워진다. 영원히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으리라.” 계간지 (2008년 가을호)에서 옮겼다.
시의 두 정곡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찌르는 코멘트라고 생각한다. 시는 비겁의 자취일 수도 있고, 사건으로의 진입일 수도 있다. 전자는 ‘있는 나’를 치열하게 발라내는 일이고, 후자는 ‘없는 나’를 만나러 가는 일이다. ‘나’와 시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일단 이것으로 넉넉하다. 시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말을 좀 보태볼까. 좀 과감하게 말하면, ‘나’ 없는 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는 감각의 경련이고 언어의 운동이다. 그것만으로도 시가 된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강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번역된 외국시를 읽는 일은 원칙적으로 허망한 일이다. 감각의 경련은 상당 부분이, 언어의 운동은 거의 전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이야기와 메시지가 남는다. 아쉽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번역시들이 드물게 있으니 다행이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다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략)/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사진첩’에서) 우아하게 우회하는 이 이야기는 삶을 어른스러운 담담함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한 편 더 읽자.
“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 번도 대화한 적 없고,/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네가 행세하는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이런, 서류 분쇄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잖아.”(‘이력서 쓰기’에서) 경쾌한 반어로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시다. 이 정도면 인천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199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선집 (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두 편 옮겼다. 최성은 교수(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의 번역이 워낙 훌륭하기도 하지만, 대개 이야기와 메시지로 버티고 서 있는 시들이라서 더 온전히 번역될 수 있었다. “행복한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여,/ 행복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쳐라”(‘행복한 사랑’)라고 선동하면서 솔로부대들을 감동시키는 시, 뒤돌아보다 소금기둥 된 성경 속 여인이 실은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죽는다 해도 남편은 절대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는 갑작스러운 확신 때문에”(‘롯의 부인’에서) 그리 했다고 주장하는 시 등은 특히나 상쾌하다. 멘터링(mentoring)의 시라고 할까. 경쾌한 통찰과 다정한 지혜들 덕분에 500쪽짜리 시집이 사랑스럽다. 번역된 랭보의 시를 읽고 절망해서 외국시와는 절교한 분들께 이 시집을 권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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