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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끊기기 전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용산 희생자들을 ‘인간’으로 복권해주는 판결이 나오지 않는 시대, 문학은 법과도 싸우라
등록 2009-11-20 11:00 수정 2022-12-15 15:51

10월28일, 그러니까 용산 재판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구형된 날에, 나는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문학동네 펴냄)를 읽고 있었다. 당대를 다루는 소설이었지만 김훈은 여전했다. 지상에서의 삶은 문명이나 이념 따위와 무관하게 약육강식의 원리로 이루어지고, 인간의 시간은 역사나 진보 따위와는 무관하게 자연사(自然史)로 흐른다는 특유의 생각이 페이지마다 단호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그 단호함은 ‘팩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10월28일,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법부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관철한 그날에, 김훈의 말들은 내게 거의 진리로 보였다.

서울 용산 4구역 내 남일당 건물 앞에 놓인 꽃. 한겨레 강창광 기자

서울 용산 4구역 내 남일당 건물 앞에 놓인 꽃. 한겨레 강창광 기자

10월28일의 선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올해 봄에 출간된 <오든 시선집>(봉준수 편역, 나남 펴냄)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소위 세상의 주인이라는 민중,/ 모두가 똑같이 존중받는다지만/ 그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손안에 있었다. 도움을 바라지도/ 받지도 못했던 약자들,/ 적들은 바라던 것을 이미 해버렸으니/ 못된 인간들이 원했던 것은 민중들의 수모, 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아킬레스의 방패’에서) 오든의 문장 중에서는 다소 투박한 편에 속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대목 때문에 옮겨 적었다.

10월28일에 일어난 일이 그와 같다. 피고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무죄 선고까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최소한, 어째서 그런 참혹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약자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는 판결이기를,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인간’으로 복권해주는 판결이기를 기대했다. 부당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게 하고 다시 그 법으로 처벌하는 이 해괴한 악순환 속에서 재판부가 고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뇌는커녕,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재판을 방해했다’며 도리어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화가 나기 이전에 뭔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현행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으로서는 달리 어찌할 여지가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법은 무정하나 법관은 무정하지 않을 테니, 최소한 고뇌는 했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저토록 무정한가. 그들은 그저 재판기계인가. “소녀들은 겁탈당하고, 두 소년이 다른 한 소년을 찌르는 것은/ 누더기 소년에겐 자명한 세상의 이치, 그는 약속이/ 지켜지거나 딴 사람이 운다고 따라 우는 세상은/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라.”(같은 시) 오든의 말대로 이것이 ‘자명한 세상의 이치’인가. ‘소년’의 울음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한다면 도대체 법은 왜 있어야 하나.

정의로운 법과 선량한 법관들을 모독할 생각은 없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을 쓰레기 분리수거나 해충 박멸 정도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도 분명 대한민국의 법이라면, 그 법에는 영혼이 없을 것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영혼은 없을 것이다. 오든의 유명한 시 ‘법은 사랑처럼’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처럼 어디에 왜 있는지 모르고/ 사랑처럼 강요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사랑처럼 가끔 울게 되고/ 사랑처럼 대개는 못 지키는 것.”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법은 사랑의 논리화가 아니라 폭력의 합리화에 가깝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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