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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아름다운 비명 소리


‘시읽남이 뽑은 2009 올해의 첫 시집’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등록 2009-12-10 02:47 수정 2022-12-15 06:51

연말이고 하니 ‘시 읽어주는 남자 시상식’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심사위원은 ‘남자’ 1인(이라고 해서 건방지다 마시고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길). 오늘 발표할 것은 ‘2009 올해의 첫 시집’ 부문. 그러니까 신인상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다. 공동 수상작은 오은의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과 강성은의 첫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이다. 선정 이유는 이렇다. 첫 번째 시집이라면 이런저런 모색의 흔적들을 어지럽게 포괄하고 있을 법한데, 이 두 시집은 확고한 방법론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 전자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후자에 대해서만 말하자.

이상하게 아름다운 비명 소리. REUTERS/ David Gray

이상하게 아름다운 비명 소리. REUTERS/ David Gray

강성은의 시집을 열면 “옛날이야기 들려줄까…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세헤라자데’)라는 구절이 독자를 맞이한다. 어떤 이야기인가. ‘시집 해설’에서 시인 함성호는 이 시인을 ‘동화 연산 시 기계장치’라고 명명했다. 물론 적절한 지적인데, 그렇다고 독자 여러분이 ‘동화’라는 말에서 무슨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마따나 문학작품은 “현실적 모순의 상상적 해결”이거니와, ‘동화’는, 그 상상적 해결의 과정에서 동원된, 이 시인에게 체질화된 어떤 말하기 방식일 뿐, 그 말의 뿌리에는 현실적 모순들이 또한 뜨거울 테니 말이다.

바로 그 현실적 모순들이, 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조용한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거칠게 나누자면 ‘현실’에는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동화들에는 우선 한 여성이 살아오면서 겪었을 여러 슬픔들, 그러니까 ‘개인적 현실’이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의 고통이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알아요/ 비가 올 때마다 젖지만 우산은 스무 개가 넘어요”(‘스물’)와 같은 아픈 구절들을, 맹목적인 사랑의 체험이 “우리는 우리를 읽지 못해 장님이 되는 밤”(‘오, 사랑’)과 같은 멋진 구절을 낳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재앙이나 범죄 같은 어두운 힘이 이끄는 시가 더러 보이거니와, 이는 언뜻 동화처럼 보이는 시들에서도 ‘사회적 현실’의 반향을 잘 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예컨대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라는 구절로 시작된 시가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와 같은 구절로 이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혹시 ‘고딕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되새겨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화학적 분별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시는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비극이 분리 불가능한 채로 뒤섞여 있고, 이것이 그 성분들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돼서 동화적 단순성에 도달한, 강성은 특유의 ‘이미지-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 대목이 이 시집의 핵이다. 그 이야기들은 대개 ‘이상한’과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의 지휘를 받는데, ‘이상한’ 것을 말하는 세 편의 시(‘이상한 여름’ ‘이상한 욕실’ ‘이상한 방문자’)와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는 두 편의 시(‘아름다운 불’ ‘아름다운 계단’)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시집 전체가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개성은 이상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에서 이상한 것을 읽어내는 창조적인 괴벽(怪癖)에 있다. 그 결과 그녀의 좋은 시들은 궁극적으로 ‘이상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는데, 사실 이는 좋은 시의 기본적인 덕목이기도 하다. 이 ‘세헤라자데’의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삶과 문명과 현실원칙을 향해 보내는 조소”(남진우)로 읽는 데 나는 동의하지만, 시 자체가 짓고 있는 표정은 ‘비웃는 미소’라기보다는 ‘슬픈 미소’에 더 가깝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 미소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해 아쉽다. 책날개에 있는 시인의 미소를 참조해서 직접 읽어보시길. ‘올해의 첫 시집’ 선정 이유서, 끝.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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