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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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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싶지 않은 학교를 위하여

‘백반 정식’ 같은 창비 300번째 기념시집…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미학적으로 보수적인 틀을 고집해온 결과
등록 2009-05-20 14:48 수정 2022-12-15 15:46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1966년 이래로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내고 뒤이어 숱한 단행본을 출간해온 출판사 ‘창비’(옛 이름은 ‘창작과비평사’)의 별칭은 ‘창비학교’다. 책 속에만 있고 강의로만 존재하는 학교다. 이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이도 있고, 중도 자퇴한 이도 있으며, 졸업을 못해 아직도 다니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창비가 학교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못한다. 1970∼80년대에 문학을 시작한 선배들에게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90년대 중반 학번인 우리 세대에게도 창비는 여전히 학교였다. 우리가 입학할 무렵 이 학교는 변화와 쇄신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늦깎이 공부를 하는 듯한 조바심 속에서 이 학교의 과거 커리큘럼들을 섭렵해야 했다. ‘창비시선’이라는 이름의 시집들도 전공필수였다.

그 시집 시리즈의 1번이 신경림의 첫 시집 <농무>(1975)다. 1973년에 자비로 출판된 <농무>(월간문학사)가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이 시집을 창비에서 증보판 형태로 재출간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농무>다. 만약 60년대 후반에 창비 쪽에 전달된 김지하의 시가 ‘게재 불가’ 판정을 받으면서 반려되지 않았더라면(이 ‘반려’는 김수영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졌거니와, 이를 두고 세간의 왈가왈부들이 있지만, 전위예술의 불온성을 지지하던 60년대 후반의 김수영이 김지하의 그 무렵 시를 ‘인민군 군가’ 같다고 판단한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몇 년 뒤 출간된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한얼문고·1970)가 창비시선 1번이 될 수도 있었을까? 아무려나, 김지하는 훗날 <타는 목마름으로>(1982)로 창비시선 33번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시집이 300권째를 맞았고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가 나왔다. 뒤표지에 “우리 시대의 시는 사람을 되찾아야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람, 바로 그것이 언제나 창비시선의 위력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람에 대한 애정·신뢰·격려로 뜨거운 시들이 그간 출간된 299권의 시집 곳곳에 가득할 것이다. 이번 시집만 봐도 어지간히 절감하게 된다. 최명희 선생을 회고하는 이시영의 시, 먼저 간 벗을 떠올리는 김사인과 나희덕의 시, 터무니없도록 슬픈 죽음을 노래하는 이진명과 문인수의 시 등은 아프고 꿋꿋하고 또 아름답다. 허수경·문태준·이병률 등의 시는, 앞서 거론한 시인들의 시 역시 그렇거니와, 시가 사람을 노래하는 것이되 그것만일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언어를 다루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노동임을 유려한 기예로 증명한다.

바로 이 얘기를 하려고 한다. 시는 언어를 다루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노동이다. ‘사람’은 시만의 것이 아니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사람 없이는, 없다. 시를 시로 만드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은 언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절반에 가까운 시들에서 나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예가 선사하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백반 정식 같은, 단아한 서정시들. 요즘 시인들이 기교적으로 시를 ‘만든다’는 힐난이 가끔 들리지만, 나는 모범답안처럼 단정한 시들에서 오히려 ‘이렇게 쓰면 감동적일 것’이라는 ‘계산’이 읽힌다. 사람에 대한 애정·신뢰·격려는 늘 이렇게 서정적이어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창비시선의 기조는 (거친 규정임을 알지만) ‘민중적 서정시’라는 큰 틀에서 과격하게 벗어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미학적으로는 보수적인 틀을 고수해온 것은 한국 문학 특유의 현상이다. 구미 문학사에서 정치적 좌파와 결합(물론 애증 관계이긴 했으나)한 것은 과격한 아방가르드들이었다. 한국 문학사는 무자비한 전위를 많이 길러내지 못했다. 보수가 그들을 혐오한 것은 당연하다 쳐도, 진보조차 그들을 철없어했기 때문이다. 이 미학적 보수성이 한때는 ‘민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동일한 것이 ‘대중주의’로 비판받게 될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는 대중과 함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창비학교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거니와 실제로 변화의 조짐도 보여 고무적이다. 이 변화가 더 탄력을 받는다면 우리의 졸업도 무한정 연기될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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