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대기 중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 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神父)’의 이야기라고 한다. 하고 싶은 말과 만들고 싶은 화면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비전과 기교를 함께 갖춘 감독이니 이번에도 본때를 보여주겠지. 그러니 오늘은 뱀파이어 이야기나 해볼까.
동유럽에 퍼져 있던 흡혈귀 설화의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존 폴리도리의 소설 (1819)에서였다고 한다(당시에는 저명한 바이런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후 이 소재는 19세기 내내 낭만주의자들의 단골 메뉴로 애용된다.
보들레르의 (1857)에도 ‘흡혈귀’(뱀파이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애증의 연인 잔 뒤발을 흡혈귀에 비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에서, 흡혈귀를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나’에게 “독약과 칼날”은 이렇게 응수한다. “설령 우리의 노력이/ 그녀의 지배에서 너를 구해준다 해도,/ 네 입맞춤은 네 흡혈귀의 시체를/ 되살려낼걸!” 인간 욕망의 악마성에 예민했던 시인답게, 흡혈귀를 기르는 것은 내 안의 병리성임을 적시했고 끔찍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흡혈귀의 이중성에 기대어 고단한 사랑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히 심오하지 않다. 브람 스토커의 장편소설 (1897)가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이 소설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출현한 잡다한 뱀파이어 서사들의 원본이 됐다. 무르나우의 (1922)에서부터 코폴라의 (1992)에 이르는 영화들도 저 고전에 빚지고 있다. 이후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된 것은 앤 라이스의 소설 다. (1976)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시리즈 덕분에 뱀파이어는 ‘고뇌하는 실존주의자’의 형상을 얻었다. 영화 쪽에선 캐서린 비글로의 (Nera Dark·1987)나 아벨 페라라의 (1995) 등이 유사한 방향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뱀파이어가 햄릿형 캐릭터로 진화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니까. 실로 ‘사느냐 죽느냐’인 거다. 게다가 그들의 사랑은 늘 파괴를 동반해야 하니 괴롭다. 시 ‘흡혈귀’(·1996)에서 남진우는 “내 사랑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고뇌하는 뱀파이어의 탄식을 받아 적었다. 이 흡혈귀는 “사랑하는 여인의 흰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처박고”는 운다. 같은 시집에 수록돼 있는 ‘가시’ ‘일각수’ 등과 더불어, 인간 운명의 어두운 본질 중에서도 특히 사랑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 사례다. (김영하의 흥미진진한 단편 ‘흡혈귀’가 한때 죽음이라는 주제에 몰두한 저 시인을 모델로 쓰였다는 소문이 있다.)
2005년 이후 시작된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뱀파이어 서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분기점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틴에이저 뱀파이어들이 화사하게 출몰하면서 불안정한 정체성을 산다(生). 거의 ‘매력적인 소수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시인 장이지는 ‘젊은 흡혈귀의 초상’(·2007)에서 부유하는 동시대 청춘들을 멜랑콜리한 흡혈귀에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물고 싶은 송곳니와 물리고 싶은 목을 가진/ 젊은 영혼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까닭은 이렇다.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피에 탐닉한다.” 같은 시집에 수록돼 있는 ‘흡혈귀의 책’도 매력적이다. 최근에 발표된 시 중 각별히 아름다운 한 편을 더 읽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버리지 않는다면.”(‘안녕, 드라큘라’) 계간 (2009년 봄호)에 발표된 하재연의 시 후반부다. 흡혈귀에게 바쳐진 이 연서는 범박하고 지루한 “빛나는 햇살”의 사랑을 우아하게 냉대하면서 진짜 사랑은 “쏟아지는 어둠” 속에 있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보들레르에서 하재연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의 내포는 이렇게 변해왔다. 이 모티프는 계속 진화해나갈 것이다. 뱀파이어는 불멸이니까.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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