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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읽어야 할 것 투성이


‘싱싱한’ 제목을 낚아서 ‘해묵은 단어’의 시를 시식해보다 걸린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과 <껌>
등록 2009-05-01 13:50 수정 2020-05-03 04:25
<이십억 광년의 고독>과 <껌>

<이십억 광년의 고독>과 <껌>

문득 시가 읽고 싶어 서점에 들른 당신은 어떤 시집을 골라야 할지 막막하다. 그럴 때엔 먼저 제목을 보라. ‘네가 뭐뭐할 때 나는 뭐뭐한다’ 같은 식의 흔해빠진 서술형 제목, ‘이별은 어쩌고저쩌고다’와 같은 식의 용감한 정의(定義)형 제목들을 피해가다 보면 이상한 제목의 책들이 눈에 띌 것이다. 이를테면 (문학과지성사·2009) 같은. 지은이는 다니카와 슌타로. 근데 생면부지의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이제 두 번째 단계. 시집 제목은 싱싱한 것으로 고르되, 시식용 시 제목은 반대로 고르자. 목차를 펼쳐서 사랑, 그리움, 슬픔 따위의 해묵은 단어들을 제목 안에 품고 있는 시를 먼저 읽어보라. 본래 시인의 진짜 실력은 저런 진부한 소재들을 처리하는 솜씨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감히 ‘사랑’ 운운하는 제목의 시를 쓴다는 것은 기왕의 수많은 시들과 진검승부 한판 하겠다는 얘기다. 마침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제목의 시가 있군.

“연인이 얄궂게 웃는 얼굴의 뜻을 읽어낼 수 없어서/ 그는 연애론을 읽는다/ 펼쳐든 페이지 위의 사랑은/ 향내도 감촉도 없지만/ 의미들로 넘쳐난다// 그는 책을 덮고 한숨을 짓는다/ 그러고 나서 유도 연습하러 나간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코치의 질타가 날아든다// 그날 밤 연인에게 키스를 거절당한 그는 생각한다/ 이 세상은 읽어야 하는 것투성이야/ 사람의 마음 읽기에 비해/ 책 읽기 따위는 누워서 떡 먹기다.”(‘사랑에 빠진 남자’에서)

이 정도면 믿어도 좋다. ‘연애론’에서 ‘유도’로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재치, “이 세상엔 읽어야 하는 것투성이야”라는 상큼한 투정이 있으니까. 나머지를 마저 옮긴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것을 읽어내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은 언어를 읽어낼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는 다시 연애론을 펼쳐든다/ 한숨 쉬면서/ 콘돔을 책갈피 대신 삼아.” 과하지 않은 메시지를 슬쩍 내려놓은 다음, 아무래도 독자를 가르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는 듯, ‘콘돔=책갈피’로 유머러스하게 수습하는 모양새가 프로다.

언어가 아닌 것을 읽어내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은 언어를 읽어낼 수 있다 했다. 이 구절이 마음에 든다면 시집 한 권 더 사도 좋겠다. 기왕이면 ‘언어가 아닌 것’을 잘 읽어내는 시인의 책으로. 김기택의 다섯 번째 시집 (창비·2009)이 적절하겠다. 우리네 시인들 중에서 특히 ‘잘 보는 사람’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다. 퀴즈 프로에서 ‘정확한 관찰과 집요한 묘사로 유명한 이 시인은…’ 운운하면 더 들을 것도 없이 ‘정답, 김기택!’ 하면 될 정도로. 그러나 ‘잘 보는 사람’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말이지 그는 ‘잘 읽는 사람’이다.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슬픈 얼굴’에서) 슬픈 얼굴을 그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를 ‘읽고’ 있다. 슬픔이 무슨 생명체인 양, 그 행보와 속내와 귀추를 따라가고 있다.

‘읽어낸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이에 관한 한 김기택은 독보적이다. 슬픔·죽음·속도 같은 뿌연 개념들이 주어의 자리를 꿰차고 막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노라면 서스펜스가 느껴질 정도다. 특히 이 시는 특유의 냉철한 ‘읽어내기’가 어떤 정서적 울림까지 품고 있는 경우라서 골랐다. 시를 쓰려는 학생들에게 ‘관찰과 묘사’의 전범이 되는 시도 물론 좋지만(이 시인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다), “그날 밤 연인에게 키스를 거절당한” 사람이 감정이입까지 할 수 있는 시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이 시인의 좋은 시가 특히 그렇다).

정말이지 이 세상엔 읽어야 할 것투성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연인의 얄궂은 미소’를 읽고, 유도를 하는 사람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어떤 시인은 ‘슬픔’의 운동을 읽고, 우리는 시집을 읽는다. (공지 말씀. 3주 뒤에는 창비시선 300호 기념 시집 에 대해 쓰려고 한다. 독자 여러분, 3주 동안 같이 읽어보아요.)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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