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온 뒤인 2025년 10월9일 한 유대인 남성이 멀리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폭발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9월8일 오후 3시께(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억할 만한 회의가 열렸다.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진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창설 뒤 1만 번째 모인 자리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영구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순회 의장국인 한국을 포함한 10개 비상임 이사국 공동 명의로 제출됐다. 15개 이사국 가운데 14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여섯 번째다. 집단살해(제노사이드)가 자행되고 있음에도 국제사회는 지독히 무능했다. 지난 2년여 미국이 이를 주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우리가 제시한 평화구상의 1단계에 합의했다는 점을 발표하게 돼 매우 자랑스럽다. 합의에 따라 모든 인질이 곧 석방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합의된 지점까지 군대를 물릴 것이다. 이는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며, 항구적인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평화의 중재자에게 축복 있기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10월8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이렇게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2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20개 항목으로 이뤄진 가자지구 평화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구상은 △인질-포로 맞교환과 이스라엘군 부분 철수 △하마스의 무장해제·해산과 이스라엘군 완전 철수 △트럼프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임시 통치기구 구성과 가자지구 재건 △아랍연맹을 중심으로 한 국제치안유지군 파견 등이 뼈대다.
앞서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1월15일에도 3단계로 나뉜 휴전안에 합의한 바 있다. 휴전안은 6주로 상정한 1단계 휴전기간(1월19일~3월2일)의 16일째(2월4일)부터 2단계 휴전안 마련을 위한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협상을 교묘하게 피했다. 1단계 휴전기간이 끝나갈 무렵 이스라엘 쪽은 이슬람의 금식월 라마단과 유대교의 명절 유월절이 종료되는 4월20일까지 1단계 휴전기간을 연장하자고 역제안했다. 또 새 휴전안이 발효되기 전에 잔여 인질 59명(생존 24명·사망 35명) 가운데 절반의 신원을 넘기라고 추가 요구했다. 애초 합의와 전혀 다른 주장이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쪽 역제안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1단계 휴전기간 종료와 동시에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했다. 물과 식량 등 구호품 반입도 철저히 가로막았다. 이어 3월18일부터 가자지구 전역에서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재개했다.
하나씩 따져보자. 인질 전원 석방은 애초 휴전안의 2단계 기간에 이뤄질 조처였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병력을 완전히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2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잠시 뒤로 물러났던 이스라엘군은 다시 가자지구 복판으로 진입했다. 새로 합의한 평화안 1단계에 따라 하마스 쪽은 인질 전원을 석방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은 애초 합의안의 1단계로 복귀할 뿐이다. 애초 합의를 비틀고, 미국을 등에 업고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재합의를 종용하는 이스라엘의 ‘협상 기술’이 이번에도 통한 게다. 트럼프 대통령의 느닷없는 ‘낙관'에 선선히 공감하기 어려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스라엘에 아주 좋은 날이다. 우리의 소중한 인질들이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직후 네타냐후 총리는 성명을 내어 이렇게 밝혔다. 그는 10월9일 내각회의를 소집해 새 합의를 비준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우리의 이웃과 평화를 확장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인질 석방과 맞교환하기로 한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온 뒤인 2025년 10월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인질 광장’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든 사람들이 춤추며 자축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가자에서 전쟁을 항구적으로 종식하고, 점령군의 완전한 철수를 보장한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에 감사한다.” 하마스도 성명을 내어 이렇게 밝혔다. 하마스 쪽은 “우리 민족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합의한 내용을 철저히 준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유와 독립과 자결권을 성취할 때까지 우리 민족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화안 1단계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10월9일 에이피(AP) 통신 등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이스라엘 내각이 1단계 평화안을 비준하면 양쪽은 교전 행위를 중단한다. 이어 24시간 안에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내 정해진 지점으로 군대를 후퇴·이동하게 된다. 이에 발맞춰 하마스 쪽은 72시간 안에 생존·사망 인질 전원을 석방해야 한다. 인질이 풀려나면, 이스라엘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팔레스타인 수감자 250명과 전쟁 기간에 체포·구금된 수감자 1700명을 석방하기로 했다. 가로막혔던 구호물품의 가자지구 진입도 허용된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1단계의 주요 내용이다. 왜 이 시점에 1단계 평화안 합의가 성사됐을까?
“네타냐후 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축하한다고 하더라. 이제 전세계가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그래서 답해줬다. 더욱 중요한 건 전세계가 다시 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이다. 이건 정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화안 합의 발표 직후 폭스뉴스에 출연해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관세 부과 위협이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비롯한 지구촌 여러 지역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전에도 말했듯 관세가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10월9일 이렇게 보도했다.
“10월10일로 예정된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1단계 평화안 합의의 마지막 추동력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고, 가자지구에서 평화를 중재하면 실제 수상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노벨위원회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수상자는 (평화구상) 발표 이전에 이미 결정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막판에 서두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다.”
1단계 평화안은 큰 탈 없이 이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작 어려운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를테면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평화구상 20개항에는 하마스의 조건 없는 무장해제와 해산이 포함됐다. 쉽지 않은 과제일 터다. 하마스는 1987년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가자지구 지부 격으로 창설됐다. 무장조직으로만 알려졌지만,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빈민구제 단체이자 정당이기도 하다.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것도 합법적인 정당성을 갖췄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직후인 2006년 1월 치른 자치의회 선거에서 하마스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을 비롯해 영국 등 유럽 각국은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에 경악해 원조를 중단하면서 하마스는 고립됐다. 이후 이스라엘은 무시로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툭하면 육지와 공중과 해상에서 전방위로 때려댔다.
평화안에서 가자지구 재건을 주도하기로 한 임시 통치기구를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특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2006년 1월 선거에서 승리한 하마스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블레어 전 총리는 2017년 10월14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그때 처음부터 하마스와 대화를 추진해 그들이 입장을 바꾸도록 설득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그리했을 것”이라며 “당시엔 이스라엘의 반대가 워낙 거세서 어려웠다. 어쨌거나 비공식적으로라도 하마스와 대화를 추진할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블레어 전 총리는 ‘성실한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

2025년 10월8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나세르병원 소아과 병동 복도에서 피란민으로 보이는 모녀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평화구상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에 딸린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된 팔레스타인 땅과 이스라엘에 대한 독립국제조사위원회’의 나비 필라이 위원장은 10월6일 중동 전문매체 미들이스트아이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24년 7월19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점령은 불법이다. 즉각 조건 없이 점령을 끝내야 한다”는 권고 의견을 냈다. 이어 같은 해 9월18일 유엔 총회는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 의견을 1년 안에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필라이 위원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구상은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한다. 평화구상 발표 뒤에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100명 넘는 주민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평화구상에 따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치안 유지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반면 가자지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팔레스타인인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국제법이 보장한 가자지구의 독립성을 침해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주민의 자결권을 짓밟은 건 불법이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 곧 평화가 온단다. 이번엔 얼마나 머무를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 그곳에 굶주려 쇠약해진 이들이 용케 살아 있다. 어떻게 내일을 버텨낼 텐가? 필라이 위원장은 “평화구상 이행 단계에서 반드시 팔레스타인인의 참여와 주도적 역할이 보장돼야 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고, 다른 방법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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