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 광화문광장을 붉게 물들였던 촛불이 2024년 12월7일 8년 만에 여의도를 가득 메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이날, 애꿎게 또다시 순식간에 코끝이 빨개지는 12월 맹추위다.
말 그대로 ‘데자뷔’라 할 만한 풍경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달라진 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종이컵에 양초를 끼워 불을 밝혔던 ‘전통 촛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먼저 건전지를 넣어 엘이디(LED) 전구를 밝히는 ‘전자촛불’이 눈에 들어온다.
이보다 더 대세를 이룬 촛불은 케이(K)-컬처 주인공인 아이돌 그룹 응원봉이다. 11인조 다국적 보이그룹 더보이즈 응원봉은 확성기 끝부분에 하트 모양의 등이 달렸다. 토끼 머리 형태의 뉴진스 응원봉은 엑스(X)자 두 눈이 달려 익살스럽다. 오디션 우승자들로 꾸려진 워너원 응원봉은 숫자 ‘1’이 당당하게 빛난다. 녹색 네모 모양의 엔시티(NCT) 응원봉은 글자를 붙여 불을 밝히기에 적당해 인기다. 덕분에 ‘탄’ 또는 ‘핵’이란 녹색등이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한편에선 게임 애호가들이 들고나온 게임 아이템도 불을 밝힌다. ‘마인크래프트’ 게임 속 광원 아이템인 노란 사각 횃불이 대표적이다. 프로야구단 케이티(KT) 위즈의 응원봉 ‘또리’도 분홍빛으로 빛을 발한다. 이 밖에도 다양한 캐릭터가 거리의 함성과 함께 밤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이는 자신의 몸에 장식용 점멸등을 칭칭 둘러 스스로 광원이 되기도 했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이상미(32·직장인)씨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국회 결의로 해제된 뒤 다양한 형태로 빛을 발하는 ‘스마트 전자촛불’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탄핵 촉구 집회에 함께 가는 고교 동창들에게 나눠주려고 5개나 주문했다.
12월7일 여의도 가는 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교통통제를 예상해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지하철을 타려 한 것이 패착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 열차 안에 절로 밀어 넣어졌다. 공포감을 느낀 여성들은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아 압박을 견뎌야 할 정도였다.
열차에서 내려 순서를 기다리느라 여러 차례 멈춰 서길 거듭하며 지상에 올랐지만 국회 앞 도로는 이미 만원이다. 국회에서 1㎞ 이상 떨어져 의사당도 대형 모니터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기분은 더 좋았다. ‘민주주의 유린’에 대한 분노를 압도적인 시민의 수로 보여주러 나선 길이다. 멀면 멀수록 많이 모인 것이라 좋았고,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이 많아서 마음이 밝아졌다.
스마트폰도 안 터지고 무대 음향도 들리지 않아 탄핵 표결이 불성립된 것을 주변 시민들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부결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해 크게 낙담하진 않았다. 시민들 사이에서 그 소식을 들으니 위로가 됐다. 어차피 여러 차례 이곳에 나오려고 거금을 들여 촛불을 산 터다.
집에 돌아온 상미씨는 크리스마스트리 조명 옆에 촛불을 세웠다. 성탄절까진 촛불의 기원이 이뤄졌으면 하는 뜻과 성탄의 축복으로 촛불 염원을 이뤘으면 하는 의미를 모두 담았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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