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점자는 내 첫 번째 문자체계다. ‘강아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내 머리엔 구부러진 초성 기역과 오른쪽으로 가지를 뻗은 모음 ‘ㅏ', 동그란 모양의 이응 받침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여섯 개의 점을 한 칸으로 하는 점형 ‘⠫⠶⠣⠨⠕'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주된 문자체계로 한글점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사라는 직업생활에서 점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내가 외국어를 가르친다는 점 또한 점자의 중요성을 더한다. 점자가 없었다면 난 당장의 수업은커녕 애초에 영어교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귀로만 듣고 공부하는 것과 한자 한자 글자를 더듬어가며 외국어를 학습하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26년 3월 첫 수업을 앞두고 나는 내가 가르쳐야 할 영어교과서 점자책을 받지 못했다. 올해 우리 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교과서가 아직 점자책으로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을 준비하고 1년치 평가계획도 세워야 했지만 난 그저 빈손이었다. 교과서도 못 받았는데 지도서는 언감생심. 점자 교과서와 지도서는 교육부 장관이 의무적으로 보급해야 하는 ‘교과용 도서'로 법에 규정됐지만, 숭숭 뚫린 허술한 법제와 교육당국의 무관심 앞에서 나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 시각장애가 있는 교사와 학생들이 거의 학년 초마다 겪는 일이다. 그렇다보니 교사 사이에서는 저작권법 위반을 무릅쓰고 이전 연도 교과서 전자파일을 암암리에 공유하는 것이 흔하다. 학생은 담당 교사들이 점자 교과서가 오는 시점에 맞춰 진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피해간다. 모두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교사는 범법의 가책을, 학생은 교사에 대한 의존을 오랜 기간 내재화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 현장이 시각장애 교사와 학생에게 여태껏 가르친 ‘제도화된 비굴함'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점은, 최근 들어 시각장애 교사와 학생에 대한 고질적인 교과서 보급 지연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법·입법적 노력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2025년 11월, 시각장애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 한 명을 포함한 17명의 청구인이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교과서를 제때 받지 못하는 것이 교육권과 평등권에 대한 침해라는 취지다. 2026년 2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이 사건을 전원재판부 심판에 회부했고, 국회에서도 출판사가 점자 등 교과서 제작에 필요한 기초 파일을 교육당국에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백승아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이 법안만으로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 국회 심사 과정에서 교육부 요청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파일을 안 넘겨도 된다'는 독소조항이 들어갔다. 출판사 쪽에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준 셈이다. 이 법안이 교육부의 면벌성 이법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이후 법안 심사 과정에서 출판사의 의무를 검정심사 단계에 부과하는 등 더욱 본질적인 해법을 추가해야 한다. 앞으로도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이 길 위에서 헌재가 시각장애 교사와 학생이 당연한 듯 감내해온 차별을 낱낱이 드러내 실질적 변화를 끌어내길 간절히 바란다.
지난 몇 년 사이 교육 현장은 온통 인공지능과 디지털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 안에서 시각장애 교사와 학생들은 벽 위에 또 다른 벽이 쌓이는 공포를 느꼈다. 교과서조차 미흡한데 기술로 어떤 혁신이 가능할까? 적어도 교과서에 관한 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아직 새 학년 새 학기 첫날, 교사와 학생이 똑같은 책을 손에 들고 서로를 마주하는 그 일상적 풍경이 나와 시각장애 동료들에겐 생경하다. 그 일상을 우리에게도 허락해주길 바란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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