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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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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도 거대한 스마트폰

대형 LED 전광판 서울 도심 장악… 탄핵 광장에서 정작 존재감 사라진 이유는?
등록 2025-11-13 22:04 수정 2025-11-19 11:53
시민과 관광객들이 2025년 11월11일 대형 엘이디(LED) 전광판이 늘어선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을 걷고 있다.

시민과 관광객들이 2025년 11월11일 대형 엘이디(LED) 전광판이 늘어선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을 걷고 있다.


고개 숙인 이는 스마트폰을 보고, 고개 든 이는 대형 엘이디(LED·발광다이오드) 전광판을 본다. 서울 광화문광장 앞 건널목 풍경이다.

서울 을지로 입구 네거리도 대형 전광판이 빼곡하다. 엘이디 기술이 발전하면서 곡선형(커브드) 전광판도 등장했다. 원형 건물을 감싸거나, 90도로 꺾여 모퉁이를 돌면서도 영상을 볼 수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짧고 자극적인 영상이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거리를 밝히는 전광판 영상도 강력한 순간의 자극으로 시민들을 사로잡는다. 인기 만화 캐릭터가 호들갑을 떨고, 유명 배우가 명품을 걸친 채 연기에 골몰한다.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황희찬 등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팔짱을 낀 채 ‘여기는 우리의 홈’이란 글귀로 홈팬의 응원을 호소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휘감은 전광판에선 광복 80주년을 축하하는 글귀와 거북선이 힘차게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영상이 고화질로 재현된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던 2002년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대형 전광판이 붙박이로 설치된 곳이 몇 곳뿐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 옥상이다. 자연스레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웠던 수십 만의 거리 응원단은 일민미술관 옥상 전광판을 향해 자리를 잡았다. 이 전광판은 곡선형으로 진화해 지금도 영상을 내보내고 있다.

서울광장이나 강남역 네거리 등에 모인 거리 응원단 앞에는 임시무대와 전광판이 설치됐다. 이곳들의 강점은 경기에 앞서 무대에 오른 록밴드가 ‘오 필승 코리아’ 등 응원곡을 라이브로 연주하며 시민들의 열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경기 호각이 울리기도 전에 승리를 갈구하는 열망이 거리를 휩쓸었다.

광화문광장을 둘러싸고 늘어난 전광판의 운영자는 공공기관부터 통신사, 미디어 기업 등 제각각이다. 그 때문에 불법적인 계엄을 규탄하거나 내란을 일으킨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 이 전광판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사회·정치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전광판들이지만 국가 대항 스포츠에서는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 2026년 6월 사상 처음 3개 나라에서 분산해 열리는 북중미 월드컵 때 광장을 찾는 시민들은 실감 나는 영상에 한껏 달아오를 것이다.

벌써 11월 중순을 넘어 2025년 세밑을 향해 달려가는 겨울 어귀, 광장 옆 통신사 전광판에는 “당신의 상상력으로 [ ] 이곳을 채워주세요”라는 글귀가 화면 한 귀퉁이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쌍둥이처럼 같은 크기로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전광판에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만화 캐릭터가 여백을 사이에 두고 각각 움직였다.

그 바로 앞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우리만의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준 세종대왕상이 자리하고 있다. 각종 영상과 메시지를 쏟아내는 전광판에 둘러싸인 세종대왕은 무엇을 상상하실까? 2002년 4강 신화가 데자뷔처럼 재현되길 기다리실까.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네거리 건물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 저마다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네거리 건물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 저마다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대형 전광판이 늘어선 서울 을지로 거리를 시민들이 걷고 있다.

대형 전광판이 늘어선 서울 을지로 거리를 시민들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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