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연락드려요. 잘 지내시죠?” 전화기 너머로 이민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몇 년 만의 통화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제가 책을 하나 냈거든요. 보내드리고 싶어서요.” 예전에 그가 쓴 팬덤 문화에 관한 책 를 흥미롭게 읽은 터라 새 책이 궁금했다. 책을 받아 ‘들어가는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그가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를.
지난해 그는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에서 빠졌다. 가뜩이나 여성 선정위원이 적다고 비판받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출판인으로서 온 힘을 다하기 위해서다. 그는 출판사 ‘산디’를 차리고 몸소 책을 출간했다. 10명의 직업 전환기를 다룬 가 직접 쓰고 출간까지 한 첫 책이다. 이후 그는 대중음악평론가 경력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을 계획했다. 그러고는 지난해 여름부터 올봄까지 음악가 9명을 몇 차례씩 만나 긴 인터뷰를 했다.
“페미니스트의 각성”이를 두고 그는 “지난 10년간 했던 일이기도 하면서 지난 10년간 못했던 일이기도 하다”고 썼다. 음악가 인터뷰는 늘 해온 일이었으나, 음악 얘기에다 여성을 둘러싼 여러 문제의식을 더하는 일은 발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민희는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명확한 계기 없이 그냥 찾아온 변화란다. 그는 이를 “페미니스트의 각성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고 썼다. 비슷한 각성을 나눌 만한 이들을 음악가 사이에서 찾았다. 그렇게 9명과 나눈 얘기를 풀어낸 결과물이 산디의 두 번째 책 다.
책에 나오는 음악가 중 상당수는 나도 알거나 인터뷰를 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생각과 고민을 품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은 요조의 얘기를 읽을 때였다. 요조는 지난 10년간 ‘홍대 여신’이라 불릴 때마다 막연히 불쾌했는데 페미니즘을 알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수식에서 벗어나려고 어떻게 하면 무대에서 예쁘지 않게 보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별짓을 다 해봤다. 하지만 그 수식은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발견하자 잃어버린 10년이 한꺼번에 설명됐다고 했다. 스스로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수식 자체가 문제 있는 시선에서 나왔음을 일깨워줬다는 것이다.
내가 요조에 대해 쓴 글을 검색해봤다. ‘홍대 여신’이라는 수식이 들어가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표현을 썼을까? 돌이켜보니 별생각 없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무심코 쓰는 표현이 상대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여성 전체를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
‘여신’ 또는 ‘마녀’ 프레임‘홍대 여신’ 표현에 대한 공개적인 문제제기는 오지은이 먼저 했다. 그는 올해 초 에 기고한 ‘홍대 여신은 혐오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마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너무나 전형적이다. 여신 또는 마녀의 프레임은 한국 사회가 여성 창작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창작자 고유의 인간으로서의 개성을 똑바로 봐주지 않는 것이다.”
요조도 이 글을 읽었다. 동료가 나서 여성 음악가를 둘러싼 차별과 혐오를 말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면 또 욕을 먹겠지?” 하고 스스로를 검열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음에 힘을 얻었고, 나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요조는 사흘 뒤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냈다. 기사 제목은 ‘홍대 여신이 왜 불쾌한 명칭인지 알았죠’였다. 요조는 인터뷰를 마친 뒤 누군가 그 말을 오해할까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돌아온 반응은 공감과 이해, 그리고 오해에 대한 사과였다. 나 또한 요조에게 이 글을 빌려 사과한다. 언젠가 그를 만나면 직접 사과할 것이다.
소히와는 10여 년 전 인터뷰를 했다. 브라질 대중음악(MPB) 요소를 섞은 솔로 음반 를 비롯해 음악 얘기를 주로 나눴다. 이민희와의 인터뷰에서 소히는 다른 얘기도 들려준다. 자신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임을 고백한 얘기다. 첫 고백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료 가수 송은지와 ‘흐른’, 여성학을 연구하는 친구들과 함께 세미나를 열고 토론하는 작은 모임 ‘릴리스의 시선’을 결성했다. 취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을 실어줄 문화 활동을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훗날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컴필레이션 음반 로 이어진다.
첫 세미나를 마치고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 모임 구성원들이 여성으로 겪어왔던 불편한 경험을 나누던 그때, 소히는 고백했다. 그날 이후 뭐가 달라졌는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말할수록 강해짐과 동시에 편안해짐을 느꼈다. 소히는 2집 , 3집 , 4집 같은 노래에서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말하고 노래하고 쓸 거라 했다. 주변 남자들 딴에는 소히를 위해준다는 생각에 “말하고 다니지 않는 게 좋겠어” 한다. 하지만 소히는 자신의 고백을 시작으로 새로운 고백이 이어지는 걸 봐왔다. 그럴수록 말해야 한다는 걸 소히는 다시금 깨닫는다.
음악가들이 꼽은 페미니즘 교과서책에는 앞서 언급한 요조, 오지은, 소히를 비롯해 김민정(에고펑션에러), 백수정(다이얼라잇), 안예은, 연리목, 흐른, 그리고 9명 중 유일한 남성 음악가인 유병덕(9와 숫자들)의 얘기가 실렸다. 각자 꼽은 페미니즘 교과서 목록도 있어, 페미니즘이 궁금한 이들을 위한 길라잡이 구실도 한다. 나 또한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당장 김민정이 추천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와 요조가 추천한 (아이즈 편집부 지음, 아이즈북스 펴냄)부터 시작해야겠다.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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