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김부장’은 대기업 25년차 부장이라는 직위를 끊임없이 되뇌며 자기암시를 하는 김낙수 부장이 ‘신분의 정점’에서 낙하하는 궤적을 그린다. 제이티비시(jtbc) 제공
“남자가 말이야 대기업을 다녀야지, 중소기업이 뭐냐?”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부장이었던 사수는 중소기업 거래처와의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합그룹 공채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대기업 외엔 다녀본 적 없다는 점을 평생의 자부심처럼 여겼다. 처음엔 그의 개인적 취향이라 여겼지만, 이후 중소기업으로 이직하며 이 감각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감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한테 잘해주시면 혹시 알아요?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기회도 생기고 그렇잖아요.”
S그룹 계열사 직원이 미팅 후 내게 건넨 말이다. 반존대가 자연스럽게 섞인 그 말에는 단순히 기업 규모에 대한 판단을 넘어 신분적 우월감이 실려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무엇을 자랑할 때 그것이 곧 그가 가진 최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 대기업이라는 명함은 곧 자신의 인생에서 이룩한 최대치였다. 직장인 커뮤니티에서도 대기업이 만들어내는 위계는 쉽게 관찰된다. 대기업이란 이름은 단순한 연봉과 처우의 문제를 넘어선 일종의 신분적 안전망으로 기능한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제이티비시(JTBC) 제공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이하 ‘김부장’)의 중심에는 이 신분이자 정체성으로서의 대기업이 있다. 고액 연봉뿐 아니라 대기업 직원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사회적 승인, 자기만족,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감각. 명함 하나가 개인의 능력을 넘어 ‘괜찮은 사람’의 증명서처럼 기능하는 사회에서 ‘김부장’은 그렇게 만들어진, 벼락부자나 제1의 권력자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평균적인 성공 신화로 일컫는 지위를 체현하는 인물이다.
대기업에 부장이라는 직급이 더해지면 좀더 강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올라갈수록 자리가 좁아지는 관료제의 특성상 대기업 부장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며, 좁은 자리인 만큼 주어지는 혜택과 권위도 상당하다. 회사 안에서 주어지는, 연봉 이상의 의미를 갖는 각종 의전과 대우는 몇 안 되는 윗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승진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작용하며 좀더 ‘성공한 인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주는 훌륭한 치장품이 된다. 드라마 ‘김부장’ 속에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대기업 25년차 부장이라는 직위를 향한 되뇜은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동시에 들리도록 외치는 자기암시이자 홍보다.
그러나 드라마가 집중하는 지점은 이 신분적 정점이 아니라, 그 정점에서 내려오는 낙하의 궤적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충격이 크듯, 한껏 자부심이 올라간 ‘부장님들’에게 진짜 공포는 이 안온함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상상과 그 상상이 실제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다른 삶을 모색할 수 있었던 시기를 잃어버린 채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자각은 뒤늦게 찾아오며, 그 순간 그동안 자신을 떠받치던 모든 의전이 사실 자신이 아니라 직함을 향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자부심의 자리에 공포를 채운다.
몇 년 전,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가는 골목길 앞에서 장사를 시작한 새우튀김 트럭 사장님이 그랬다. 명예퇴직한 대기업 부장이었던 그는 한 달이 지나도록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부장님이라 불리던 시절의 몸짓을 버리지 못한 채 버둥대던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동네에서 사라졌다. ‘김부장’이 보여주는 정체성의 균열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
드라마 ‘김부장’은 오피스물인 듯싶지만 초점은 기업 바깥에 있다.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해결이 아닌, 특정한 직함에 삶을 걸었던 이들로부터 직함이 떨어진 뒤 남은 삶 그 자체를 다룬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삶의 주인공이 사원과 대리 혹은 과장이 아닌, 관리자로서의 ‘부장님’이라는 점에 있다.
로맨스물이 아니면 부장님이 주인공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 1980년대 직장드라마 ‘TV 손자병법’의 주인공은 대리급인 유비(서인석 분), 조조(장용 분)였다.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걸쳐 있던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대표적인 콘텐츠, 신문연재만화 ‘용하다 용해’의 주인공도 무용해 대리였다.
조직의 윗선에 자리가 적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데도 이러한 부장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또 세간에 회자하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세대가 본격적인 부장님 세대라는 점도 한몫 크게 거들었을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근처에 태어난 50대 초반은 약 800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약 17%를 차지한다. 사람이 가장 많은 세대다.
사람 많은 세대로서의 김부장 세대는 사실 그 인구수 덕분에 시작부터 끝까지 미디어의 구애를 오랫동안 받았다. 이들이 어린이였던 1980년대에는 ‘야! 일요일이다’ 같은 어린이 전용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청소년기였던 1990년대에 폭발적 성장을 이룬 대중음악은 지금도 ‘추억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 레거시 미디어 역시 여전히 그들을 중심으로 돈다.
60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 반을 차지하던 이들 세대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생 2막에 서게 된 순간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 조력자 포지션에 머물렀던 부장님들의 삶에 대한 고민을 좀더 가깝게, 인간적 측면에서 다루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제이티비시(JTBC) 제공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제이티비시(JTBC) 제공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제이티비시(JTBC) 제공
40대 초반에 정석 같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프리랜서가 된 내 입장에서 ‘김부장’이 풀어가는 이야기는 부장님 본인의 당사자성이라기보다는 또래 친구들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마치 대기업 부장님이 중소기업 만년 과장을 보며 가졌던 안도감처럼 어쩌면 나야말로 부장님 친구들을 보며 ‘나는 아니니까’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장 인구 많은 세대가 마주한 삶의 불안감이 드라마로 그려지는 것을 보며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정말 우리가 부장님 걱정을 할 처지인가?’ 라는 의문이다. 30대 대기업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많이 잡아봐야 2만 명 언저리일 대기업 부장님의 고민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삶의 고민은 왜 미디어에서 이만큼 그려지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거기에 남성을 곁들인 ‘김부장’이 드러내는 낱말들은 정말 내 주변 세대를 대표하는 말인가? 만약 정말 이 네 단어가 내 세대를 대표한다고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건 내 삶 자체가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꾸려졌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약 80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의 50대 인구 중 저 조건에 속하는 사람의 수는 실질적 대표성을 가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특정한 세대를 바라볼 때 얼마나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것을 중심에 두는지를 드러낸다고 봄이 적절하다.
‘김부장’을 보면서 나 또한 분명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느꼈을 어떤 순간의 감정에 울컥하지만, 동시에 이 감정 역시 내가 그 언저리 계급 어딘가에 속해 있으니 느끼는 동질감일 뿐이라는 한계도 떠올린다.
실제 드라마 ‘김부장’이 충남 아산 공장과 서울을 서로 다른 분위기로 그려낼 때 이 이질감은 극도에 달한다. 나름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나의 모든 직장은 서울 안에 있었고, 드라마 안에서 묘사되는 아산 공장의 노동현장에 대해서는 동질감이 아닌 어깨너머의 시선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김부장’ 속 아산 공장에 등장하는 50대 숙련공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김부장’의 고뇌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칫 그 숙련공의 이야기가 누락되는 미디어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내게 ‘김부장’에 대한 동질감보다 앞서는 질문이었다.
곧 한국에서 가장 인구 많은 세대가 ‘김부장’처럼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을 것이다.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도 거세어질 변화다. 실제로 나는 주변에서 ‘김부장’보다 때로는 더 잔혹하게 회사에서 내쳐진 경우도, 혹은 그런 회사 보란 듯이 이후 삶을 매끄럽게 안착시켜 뿌듯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만난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김부장’ 이야기는 좀더 내 주변에서 가깝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마치 미리 퇴직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 위치에서 각자 이야기로 서로 다르게 읽힐 것이다. 당장 진짜 현실에서 대기업 다니는 내 친구 김부장과, 애초부터 자영업으로 시작해 중소기업 대표로 사는 친구 최사장과, 중소기업 부장으로 20년 넘게 지내고 있는 이부장은 이 드라마를 놓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최종회를 보고 나면 다들 할 말이 많아 술자리라도 만들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김부장’의 이야기를 놓고 감정 상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실제 ‘김부장’들에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 아닐까 싶다.
이경혁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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