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투(U2) 공연에서 이들을 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무대 뒤 설치된 가로 61m, 세로 14m의 초대형 엘이디(LED) 스크린에 세계 여러 나라 여성들 얼굴이 흘렀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등 영향력 있는 여성 인사들 사이로 한국 여성들도 잇따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 국가무형문화재 해녀, 한국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미투 운동에 불 붙인 서지현 검사, 한국 최연소 국제 축구 심판 홍은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설리. 이 순간 유투가 연주한 곡은 . 보노는 노래했다. “울지 말아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요. 내가 당신이 강해지길 바란다는 걸 알잖아요.”
세계 여성들이여, 단결하라보노가 이 노래를 부르기 바로 전 스크린에선 ‘히스토리’(History)라는 글귀가 ‘허스토리’(Herstory)로 바뀌는 장면이 연출됐다. 보노는 “여성들이 단결해 ‘허스토리’로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 바로 아름다운 날”이라고 말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스크린에는 ‘우먼 오브 더 월드 유나이트!’(세계 여성들이여, 단결하라!)라는 펼침막을 든 여성들 사진이 나왔다. 이어 한글로 된 글귀가 떴다.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
12월8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유투의 첫 내한공연은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니었다. 한반도와 전세계를 향해 외친 아름답고 거대한 웅변이었다. 유투는 음악에 정치·사회·철학적 메시지를 담는 걸로 유명하다. 이번 공연에서 보노의 직설적인 멘트와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무대 연출까지 더해 화룡점정을 찍었다.
무대의 막을 올린 첫 곡 부터 상징적이다. 이는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담은 노래다.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독립했지만, 영국에서 넘어온 신교도가 많았던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신도들이 각종 차별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를 벌이자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해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출신 보노는 이 노래를 부르다 막판에 이렇게 외쳤다. “노 모어! 노 워!”
세 번째로 부른 는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을 언급한 노래이고, 네 번째로 부른 는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목사를 기리는 노래다. 보노는 이날 를 존 레넌에게 바쳤다. 유투 공연이 펼쳐진 12월8일은 39년 전 존 레넌이 미국 뉴욕에서 괴한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보노는 원래 “멤피스의 하늘에 총성이 울렸지”라는 대목을 “뉴욕의 하늘에 총성이 울렸지”로 바꿔 불렀다. 음악으로 반전·평화·사랑을 주창한 존 레넌의 뒤를 보노가 잇고 있음을 상징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엘살바도르 내전, 영국 탄광 노동자…유투의 이날 공연은 ‘더 조슈아 트리 투어 2019’의 하나다. 유투를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급 밴드로 올려놓은 앨범 ≪더 조슈아 트리≫(1987)의 30주년을 기념해 2017년 시작한 투어의 연장이다. 이 때문에 ≪더 조슈아 트리≫의 전 곡을 차례로 연주하는 흔치 않은 무대를 연출했다.
앨범의 첫 곡 을 연주하자 스크린에 사막의 길을 천천히 달리는 영상이 나왔다. 마냥 서정적인 곡 같지만, 여기에도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선 거리 이름으로 사는 이의 계층, 종교 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미국 뉴욕은 맨해튼과 할렘에 사는 이들의 인종과 계층이 다르고, 로스앤젤레스에는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 등이 있다. 우리는 어떤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도봉구 쌍문동은 동네 이름만으로도 격차를 암시한다. 보노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가서 이름 없는 거리를 보고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거리에 이름이 없는 곳’은 보노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앨범의 네 번째 곡 는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 당시 정부군을 지원하며 무기를 판 미국 정부를 비판한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스크린에는 성조기 앞에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철모를 쓰는 영상이 이어졌다. 미국이 지금도 전세계 평범한 시민들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겨냥한 것으로 읽혔다. 디 에지가 보틀넥 주법(병목을 잘라 만든 듯한 ‘슬라이드 바’를 손가락에 끼고 기타 지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연주하는 주법)으로 연주한 기타 솔로가 유독 불길하면서도 구슬프게 들렸다.
여섯 번째 곡 은 1980년대 영국 대처 정부의 폐광 조치에 맞서 탄광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인 사태를 담았다. 이 노래에는 원래 브라스(관악기) 사운드가 없지만, 공연에선 브라스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브라스 사운드를 넣었다. 마치 유투와 탄광 마을 사람들이 합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대의 음악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앨범 마지막 곡 가 나올 때 스크린에는 촛불을 든 어머니들이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 실종되거나 숨진 젊은이들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며 보노는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관객도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흔들며 촛불을 든 어머니들과 보노와 교감했다.
남북으로 나뉜 아일랜드와 한반도에 평화를공연의 맨 마지막 곡은 이었다. 밴드 멤버 사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이들은 새 앨범 작업을 위해 독일 베를린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는 걸 보며 밴드도 화합을 이뤘다. 그때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 이다.
보노는 을 부르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남북으로 나뉜 우리의 땅(아일랜드)과 역시 남북으로 나뉜 여러분의 땅(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북쪽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우리가 하나 되어 노력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래가 끝나갈 즈음 스크린에 태극기가 나왔다. 순간 생각했다. 다음에 유투가 또 온다면 비무장지대(DMZ)에서 한반도기를 휘날리며 을 불렀으면 좋겠다고.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하나 되어 ‘떼창’을 했으면 좋겠다고.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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