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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축제는 이래야지

도심 벗어나는 EDM 페스티벌
등록 2019-06-26 10:58 수정 2020-05-03 04:29
6월7~9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울트라 코리아’ 현장. 울트라 코리아 제공

6월7~9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울트라 코리아’ 현장. 울트라 코리아 제공

나는 록을 들으며 자랐다. 음악축제 하면 당연히 록페스티벌이다. 멀리까지 차를 타고 가서, 주차하고 한참을 또 걸어,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그곳에서 펄쩍펄쩍 뛰는 게 좋았다. 신발이 진흙에 파묻혀 벗겨지고, 속옷까지 흠뻑 젖어, 모든 걸 내려놓을 지경까지 망가지는 순간의 그 짜릿한 쾌감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도리가 없다. 오래전 얘기다.

놀이기구 타고, 음악에 ‘방방’

요즘 음악축제의 대세는 록페스티벌이 아니라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페스티벌이다. 청춘의 송가는 이제 록이 아니라 EDM이다. 지난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국내 최대 EDM 페스티벌 ‘울트라 코리아’에는 사흘간 18만 명이 다녀갔다. 어느 록페스티벌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수치다. 그 18만 명 중 하나가 나였다. 직접 가본 EDM의 세상은 별천지였다. 일탈은 일탈이되 쾌적하고 세련된 일탈이었다. 거대한 클럽으로 변한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나오니 곧바로 일상의 풍경이었다. 여흥을 즐기러 다른 술집으로 옮기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래서 다들 EDM 페스티벌에 가는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도 EDM 페스티벌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올림픽주경기장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이곳에서 축제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최사들은 고심 끝에 대안을 마련했다. 그곳은 놀이공원이었다. 국내 토종 EDM 페스티벌의 대표 격인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월디페)이 택한 곳은 서울랜드다. 이름에 서울이 있지만, 실제로는 경기도 과천에 있다. 지하철이 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잠실에 견주면 번거로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처음엔 안 가려 했다.

마음을 바꾼 건 초등학교 4학년 딸 때문이다. 딸과 서울랜드에서 즐겁게 놀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랜만에 딸과 가보고 싶었다. 6월1일 온 가족이 나섰다. 서울랜드에 들어가 도시락을 먹고, 딸과 신나게 놀이기구를 탔다. 이젠 키가 140㎝ 넘어서 전에는 포기해야 했던, 하늘 높이 치솟았다 뚝 떨어지는 놀이기구도 탈 수 있게 됐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서울랜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롤러코스터 너머로 거대한 무대가 보였다. 월디페 메인 무대였다. 대낮부터 불빛이 번쩍이고 신나는 음악이 흘렀다. 딸이 엄마랑 노는 동안 축제 현장으로 향했다.

서킷에서 열린 ‘울트라 코리아’

월디페 무대는 서울랜드 곳곳에 퍼져 있었다. 메인 무대는 동문주차장에, 서브 무대는 반대편 삼천리광장 근처에 있었다. 가까운 서브 무대부터 갔다. 맥주를 마시며 중독적인 리듬에 몸을 맡겼다. 이젠 메인 무대에 가볼 차례였다. 서브 무대에서 메인 무대로 가려면 서울랜드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거리가 꽤 됐다. 줄지어 가는 사람들 중 코스프레를 한 이가 제법 많았다. 공룡, 텔레토비…. 자발적인 퍼레이드(행렬)에 메인 무대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도중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블랙팬서(미국 마블 영화 속 히어로)를 만났다. 사람들이 줄 서서 블랙팬서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블랙팬서와 악수하는데, 그의 팔목에도 월디페 팔찌가 걸려 있었다.

메인 무대는 놀이공원과 또 달랐다. EDM이 흐르는 가운데 불꽃이 터지고 레이저가 뻗어나갔다. 알록달록 조명을 밝히고 밤공기를 가로지르는 롤러코스터는 축제를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배경이 됐다. 밤 9시가 되자 월디페 시그니처쇼가 시작됐다. 오케스트라가 올라오더니 영국 록밴드 오아시스의 를 연주했다. 축제를 만드느라 고생한 스태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메시지가 영상으로 나왔다. 이어 원곡이 흐르면서 불꽃이 터지고 꽃가루가 날렸다. 사람들은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고 흔들며 ‘떼창’을 했다. EDM 페스티벌에서도 록은 청춘의 송가였다. “처음엔 EDM 페스티벌에서 왜 이런 걸 하나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감동이 있네.” 누군가가 옆사람에게 말했다.

올해 월디페에는 이틀간 12만 명이 왔다. 지난해 잠실에서 했을 때 이틀간 8만 명보다 50% 더 늘었다. 월디페 관계자는 “장소를 옮겨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관객도 늘고 반응이 좋았다. 놀이공원 카니발 같은 분위기가 EDM 축제와 시너지를 낸 것 같다. 앞으로 계속 서울랜드에서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인 6월7~9일 열린 울트라 코리아가 택한 곳은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였다.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서킷을 축제의 장으로 바꾼 것이다. 둘쨋날인 8일 용인으로 향했다. 토요일이라 고속도로가 막힐 걸 예상해 차를 몰고 가는 대신 ‘울트라 코리아 카카오 T 셔틀버스’를 탔다.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서울 합정역에서 행사장까지 5천원에 갈 수 있었다. 도착해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서킷이 완벽하게 다른 공간으로 변신해 있었다. 바닥의 타이어 자국만이 이곳이 자동차가 질주하던 곳이었음을 알려주었다. 그걸 보니 왠지 피가 더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일단 어마어마하게 큰 무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잠실 무대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했다. 메인 무대에서 쏜 레이저가 저 멀리 산에 가닿았다. 밤하늘에 퍼지는 초록빛 레이저는 북유럽의 오로라 같았다. 지난해 잠실이 도심 속 거대한 클럽이었다면, 이곳은 자연 한가운데 자리한 파라다이스였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났다는 일탈의 해방감이 짜릿했다. 예전 록페스티벌에 갔을 때 익숙한 그 느낌이었다. 그래, 모름지기 축제는 이래야지.

도심 페스티벌에선 느낄 수 없던 해방감

넋 놓고 신나게 놀다가도 귀갓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면 병목현상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밤 10시부터 운행을 시작하는 서울행 셔틀버스를 타려고 스크릴렉스의 무대를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버스 승차장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지만, 밤공기를 맞으며 서킷을 산책하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밤하늘이 이렇게 높고 넓다니…. 서울 도심 건물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미처 몰랐네.” 누군가의 얘기가 들려왔다. 버스를 타니 1시간도 채 안 돼 합정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올해 울트라 코리아에는 사흘간 13만 명이 찾았다. 멀어진 장소 탓에 지난해보다 5만 명이 줄었지만 왠지 지난해보다 더 흥한 것처럼 느껴졌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탁 트인 공간에서 느낀 해방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도 용인에서 한다면 또 가고 싶다. 그땐 근처에 숙소를 잡고 밤새 해방감을 느껴보련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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