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을 좋아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도 좋지만, “화양연화”라고 말할 때 그 소리가 주는 느낌이 참 좋다.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한 티브이엔(tvN) 주말 드라마 <화양연화>에 눈길이 간 건 그래서다. 일단 제목부터 내 가슴을 흔들었다. 4회까지 챙겨 봤다. 대학 시절 첫사랑을 했던 재현(유지태)과 지수(이보영)가 중년이 되어 재회하면서 겪는 일이 줄거리다. 제목에서부터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뻔하다면 뻔한 스토리인데도 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화양연화는 원래 그렇게 뻔한 것이다. 드라마 속 회상 장면에선 화사한 햇살이 비추고, 살랑이는 바람에 머리칼과 벚꽃이 흩날리고, 솜 같은 눈이 내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든 자신의 화양연화를 떠올린다면 비슷한 화면이 재생될 것이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시절
화양연화라는 말을 처음 접한 건 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2000)를 통해서였다. 그 전에는 그런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이상은 <언젠가는>)라는 노랫말처럼 화양연화는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법이어선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는 화양연화를 지나고 있으면서도 그게 화양연화인지 몰랐다. 화양연화라는 말에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애틋함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화양연화라는 말에서 가슴 설렘과 저밈을 동시에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화양연화>는 두 곡의 음악으로 기억된다. 하나는 4분의 3 박자 현악 연주곡 <유메지의 테마>다. 이는 애초 <화양연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일본 영화 <유메지>의 OST로 쓰인 곡이다. 하지만 이젠 <화양연화>의 OST로 더 유명하다. 이 곡이 흐를 때면 양조위(량차오웨이)와 장만옥(장만위)은 늘 엇갈린다.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복잡한 감정이 처연한 선율에 스며들어 있다. 또 하나는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다. 쿠바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 제목을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나를 사랑하냐는 물음에 당신은 늘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라고 답한다. 확신 없는 불안한 사랑, 그래서 더 간절하고 애틋한 사랑, 그게 <화양연화>의 핵심 정서다.
<화양연화>의 영상은 비현실적이다. 양조위는 늘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양복 정장 차림이다. 장만옥은 화려한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색깔별로 갈아입고 나온다. 대사는 많지 않고, 영상은 슬로모션으로 찍은 뮤직비디오처럼 느리고 정갈하게 흐른다. 이는 과거를 왜곡되고 정형화된 기억으로 박제하는 행태를 상징하는 듯하다. 영화 마지막에서 양조위는 이 모든 기억을 앙코르와트 사원 벽의 구멍에 묻어둔다. 그들만의 화양연화를 영원히 봉인하겠다는 듯이. 우리도 각자의 구멍에 나만의 화양연화를 묻어두었을 것이다. 이 영화 엔딩의 여운이 특히 짙은 건 깊숙이 묻어둔 그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일 테다.
살짝 꺼내고 다시 묻는 기억
<화양연화>의 이런 정서는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휘성이 2002년 발표한 음반 《라이크 어 무비》(Like A Movie)의 타이틀곡 <..안 되나요...>에는 ‘화양연화’라는 부제가 붙었다. “너무 힘들어요/ 다른 사람 곁에/ 그대가 있다는 게/ 처음 그댈 본 날/ 훨씬 그 전부터/ 이미 그랬을 텐데”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화양연화의 본래 뜻보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아픔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 속 불륜 관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 노래 말고도 음원 사이트에서 ‘화양연화’로 검색하면 100곡도 넘게 뜬다. 화양연화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그 노래들을 모두 들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만 그 가운데서 추천하라면 자신 있게 꼽을 노래가 두 곡 있다. 하나는 이승환의 <화양연화>다. 2014년 발표한 11집 《폴 투 플라이 전》(Fall To Fly 前) 수록곡이다. 음원 사이트 음반 소개글은 이 노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생애 가장 빛났던 순간, 청춘에 관한 이야기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아련하고 섬세한 가사가 스테디셀러를 예감하게 하는 노래다.” 예언대로 이 노래는 타이틀곡을 제치고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출신 싱어송라이터 이규호가 작사·작곡한 이 곡은 영화 마지막 장면의 정서를 고스란히 품는다. 선율은 화사한데, 노랫말은 먹먹하다. “기억 속에 멀어지는/ 가슴속에 타오르다 만 이름을/ 불러보고 불러보려 한다”로 시작해, “오늘도 달빛 아래 눈부신 너와 나/ (손을 잡던) 반짝이던 너와 나/ (입 맞추던) 잊지 못할 너와 나/ 모두 묻기로 했다/ 다 묻기로 했다”로 마무리한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만의 화양연화를 살짝 꺼냈다가 다시 묻어두곤 한다.
다른 하나는 시와의 <화양연화>다. 2007년 라이브클럽 빵 컴필레이션 음반에 먼저 수록한 곡을 새롭게 편곡해, 2010년 자신의 첫 정규 음반 《소요》에 다시 실었다. 이 곡을 처음 듣는 순간 나의 ‘인생노래’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잔잔한 기타와 피아노 반주 위로 시와는 느리고 담담하게 노래한다. 거기엔 별다른 감정의 고저가 없다. 노랫말도 단순하다. “그때가 그렇게 반짝였는지/ 그 시절 햇살이 눈부셨는지/ 강 한가운데 부서지던 빛/ 도시의 머리에 걸린 해/ 달리는 자전거 시원한 바람/ 이제 알아요 그렇게 눈부신/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가 사라집니다”라는 단 8소절이 전부다.
인생이 응축된 5분34초
노래를 듣는 동안 내 감정은 서서히 고조된다. 후렴을 반복하는 2절에 가면 시와는 목소리에 살짝 힘을 준다. 그런다 해도 절대 절규하지 않는다. 같은 후렴을 또 한 번 반복하는 3절에 이르러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가 사라집니다”를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노래를 끝낼 때 나는 기어이 무너지고 만다. 5분34초의 이 노래에 인생이, 나의 화양연화가 응축돼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노래를 들으며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 순간이 어쩌면 또 다른 화양연화일지 모른다고. 그러면 묘하게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마법 같은 노래다.
서정민 <한겨레>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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