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월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서울영화센터에 고 안성기 배우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
“많이 속상하고 슬프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의 시대를 잃어간다.”
류승완 감독의 말대로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가 땅에 졌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눈을 감았다. 2026년 1월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다가 세상과 작별했다. 고인은 2025년 12월30일 식사하다가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쓰러졌다. 심정지 상태로 응급실에 이송돼 치료를 받아왔다. 앞서 안성기는 2019년 혈액암 판정을 받고 투병해왔다. 투병하면서도 연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2024년 병세가 악화됐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
안성기는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거의 모든 연령대의 얼굴이 스크린에 맺힌 유일무이한 배우다. 그는 1952년 1월1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다. 영화 제작자인 부친 안화영 선생(당시 세경영화사에서 기획자로 일했고, 현진영화사 대표였다)이 김기영 감독과 친구 사이였다. 김기영 감독이 아역배우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다섯 살 소년 안성기를 데려다 썼다. 주변에 소문이 났는지 양주남 감독의 ‘모정’(1958)에 출연했다. 김기영 감독의 세계적인 걸작 ‘하녀’(1960)에서 천진한 아들을 연기했다. 아역배우 시절 그가 출연한 영화만 70여 편이다. 그는 중학생 때까지 연기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계에 복귀했다.

우연찮게도 그의 등장과 함께 세상은 바뀌었고, 한국 영화에 새로운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이장호, 배창호, 정지영, 이명세, 박광수 등 젊은 감독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유신체제 이전과는 다른 한국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이장호 감독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은 안성기가 성인 배우로 인정받는 전환점인 동시에 ‘코리안 뉴웨이브’의 시작점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덕배는 갓 상경한 어리숙한 중국집 배달부다. 이 영화의 조감독이던 배창호 감독은 안성기와의 첫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덕배를 연기할 배우가 따로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출연이 불발됐다. 배우를 다시 찾다가 안성기씨를 우연히 만났다. 개구쟁이 같았던 어린 시절 모습과 달리 상당히 차분하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지적인 면모가 인상적이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안성기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을 포함한 배창호 감독의 영화 13편에 내리 출연했다.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됐던 ‘고래사냥’(1984),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욕망이 섹시하지만 연민이 갔던 남자를 그려낸 ‘깊고 푸른 밤’(1985), 어리숙하지만 순수한 남자의 첫사랑을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에 출연하며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배 감독은 “‘깊고 푸른 밤’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호빈은 욕망의 사나이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관객이 그에게 연민을 가지게 하는 게 중요했다. 안성기의 얼굴은 대사가 없어도 대형 스크린의 클로즈업 숏을 소화할 수 있는 아우라를 갖췄다”고 말했다. 배 감독은 이어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안성기는 35살에 25살 청년 영민을 연기했다. 할리우드 영화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먼이 30대 중후반에 20대를 연기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배우와 캐릭터의 나이가 꼭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배 감독의 영화 18편 가운데 무려 13편이 안성기가 주인공이었다.

‘국민 배우’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고래사냥'. 한국영상자료원
안성기는 배창호의 페르소나라고 불러도 이상하진 않지만, 그의 보폭은 다른 감독의 세계로 확장됐다. 안성기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3),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9)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새로운 한국 영화의 얼굴로 떠올랐다. 현재 미국에서 ‘어쩔수가없다’의 오스카 레이스를 소화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은 “안성기 배우는 누구라도 언뜻 봐선 배우같이 안 생겼다고 느끼겠지만 카메라로 찍어놓으면 누구보다 배우였다”며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에서 안성기 배우가 연기한 깨철의 첫 등장 신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무사’(2001), ‘아수라’(2016), ‘서울의 봄’(2023)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도 ‘안개마을’의 깨철을 두고 “성실하고 지적인 청년, 순박한 미소를 가진 안성기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으로 강렬하게 남아 있다”고 전했다. 김 감독은 “학교 선생님(정윤희)이 마을을 떠나는 엔딩 신에서 깨철은 정류장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하릴없이 햇볕쬐기에 몰두해 있었는데, 새로 부임한 다른 여선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클로즈업이 나온다. 멍청한 ‘동네 바보형’에서 욕정이 불붙은 ‘늑대의 눈빛’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표정 연기가 압권이다. 한 숏 안에서 짧은 순간 내면에 겹겹이 쌓인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는 ‘연기 천재 안성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중국집 배달부, 회사원, 거지, 삼류 카바레의 개그맨, 간판 작업자 등 안성기가 연기한 인물들은 소탈하고, 평범하며, 욕망 때문에 무너지더라도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가진 얼굴이었다.

배우 박중훈과 함께한 영화 ‘투캅스'. 한국영상자료원
안성기의 궤적을 따라가면 한국 영화가 질적 완성도와 대중적 호감을 갖추며 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과 ‘하얀 전쟁’(1992) 같은 사회파 영화,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던 강우석 감독의 코미디 영화 ‘투캅스’(1993) 같은 기획 영화,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같은 작가주의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두루두루 얼굴을 내밀었다. 안성기와 함께 ‘개그맨’과 ‘남자는 괴로워’(1995),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Duelist’(2005) 네 편을 함께 작업한 이명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배우도 스태프도 정말 많이 고생하며 찍은 영화였는데, 살수차를 동원해 10일 동안 비를 뿌려가며 찍는데도 (안)성기 형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며 “당시 성기 형은 매니저 없이 손수 차를 몰았는데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내 운전기사를 자처해줬다. 매일 촬영 현장에 함께 출퇴근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안성기는 늘 한국 영화 촬영 현장에 있었다. 배우 경력 처음으로 조연상을 받은 영화 ‘무사’, 첫 ‘천만 영화’인 ‘실미도’(2003), 류승완 감독의 액션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2004),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박중훈과 스타와 매니저로 호흡을 맞춘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스타’(2006),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2007),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 ‘부러진 화살’(2012) 등 여러 영화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출연했다. 연기 생활에서 처음 조연을 맡았던 ‘무사’에서 안성기는 경험 많은 무사 진립을 연기했다. 김성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전부터 안성기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라 안성기의 실제 면모가 많이 투영됐다. 험난한 상황에 빠진 고려군을 돌보고 지켜봐주는 존재, 어려울 때 가장 앞에 나서주는 진짜 어른의 모습이다. 김 감독은 “200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5개월간 중국 오지에서 촬영했는데 서북 사막 지역에서 40도 넘는 더위부터 영화 20도 넘는 동북 지방의 해안까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며 “안 선배님이 항상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와 그날 오픈세트로 지은 해안 토성의 여러 곳을 분주히 다니면서 모닥불과 드럼통 난로를 몇 군데나 피우셨다. 한국과 중국의 배우, 보조출연자와 양국의 스태프 모두에게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며 누구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를 불가로 모으셨다. 그때 우리 모두 그런 선배님을 쳐다보면서 ‘와, 어떻게 저러실 수 있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라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과 임권택 감독의 ‘화장’(2014)을 제작한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부러진 화살’은 약 5억원의 초저예산 영화였는데 안성기 배우부터 막내 스태프까지 모두 노개런티와 러닝개런티 계약을 맺어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개봉 당시 346만여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해서 모두에게 투자한 만큼 돌려드려서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성기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제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씨네21 오계옥 기자
동료 영화인들에게 안성기는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구설에 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뒤늦게 와인을 즐기게 된 것 말고는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공식 행사나 인터뷰가 있는 날에는 늦을까봐 대중교통을 이용해 약속 시각보다 30분 일찍 도착하곤 했다. 배우 송강호는 “(안성기 배우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공식 석상에서 유일하게 둘이서 찍은 사진이다. 안성기 배우와 한 번도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어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며 “안성기 배우가 이사장으로 있던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 예술인상에 해마다 참석해서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배우로서의 개인적 어려움까지 털어놓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안 선배님의 높은 인격과 아량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밝혔다. 송강호는 “안성기 선배가 길을 먼저 열어준 덕분에 선배를 따라갈 수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후배 배우가 든든했다”고 덧붙였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배창호 감독은 “안성기씨는 특히 후배 배우를 소탈하게 잘 챙겼다. 먼저 다가가서 ‘맥심 커피 한잔하자’고 권하니 후배 배우들이 잘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성기는 본업인 연기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2000년에는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2006년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 영화인의 요구와 목소리를 전달했다. 박중훈과 함께 영화불법복제방지 캠페인인 ‘굿다운로더’ 홍보대사를 맡아 한국 영화가 합법적으로 유통될 수 있게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30년 넘게 어린이의 권익 증진과 보호에 헌신했다.
한국 영화가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안성기는 늘 영화인, 관객과 함께 있었다. 150편 넘는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얼굴이 오래 그리울 것 같다.
김성훈 씨네21 디지털콘텐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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