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항준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대사가 있는 배우 모두와 서너 번씩 대본 리딩 작업을 하며 대사의 내용과 톤을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사진은 촬영 중 전미도·유해진 배우와 대화를 나누는 감독 모습. 쇼박스 제공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사극영화’는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 교과서가 스포일러인 사극은 그래서 사료에 적히지 않은 공간을 상상력으로 메우고,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그 개연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관객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흡입력을 발휘해 결말에 이르러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극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렵고, 흥행에 성공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이유다.
이 시대의 이야기꾼인 장항준 감독이 이 어려운 도전에 나섰다. 2026년 2월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는 장 감독의 첫 번째 사극영화다.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 과감히 100억원대 작품을 들고 복귀한 장항준 감독을 2월1일 인터뷰했다.

신작 ‘왕과 사는 남자’로 돌아온 장항준 감독. 쇼박스 제공
“처음 기획안을 받았을 땐 부담스러워 거절했어요. 도저히 투자받을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냥 제작자한테 시나리오 초고 수정 방향을 20분 정도 조언했는데 ‘방향성이 너무 좋다며, 무조건 감독님이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일주일만 고민해본다고 초고를 들고 집에 왔는데, 와이프(김은희 작가)가 읽어보더니 ‘하는 게 좋겠다’더라고. 그래서 덜컥….” 51 대 49로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등을 떠민 것은 “장항준보다 더 능력 있는” 김은희 작가였던 셈이다. 이후 장 감독은 스무 번 이상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왕과 사는 남자’와 동기화 과정을 거쳤다.
‘왕과 사는 남자’는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조선 6대 왕 ‘단종’의 마지막 넉 달을 그린다. 역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1453년)이 아닌, 그 후의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 ‘발상의 전환’이 도드라진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이홍위(박지훈)는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의 산골인 광천골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영화는 이런 궁금증을 상상력의 실마리로 삼는다. 마을의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촌장 엄흥도(유해진)를 중심으로 단종과 광천골 사람들의 ‘관계 변화’와 그에 따른 단종의 ‘각성’을 이야기의 축으로 세운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 이홍위가 강원도 영월 광천골로 유배 와서 마을 사람들과 지낸 넉 달의 시간을 그려낸다. 쇼박스 제공
왜 단종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을까? 장 감독은 “시대를 살아낸 자의 결과물”이란 답을 내놨다. “우리 세대가 5공화국에 대학을 다녔어요. 졸업할 때까지 군사정권이었던 거지. 항상 ‘성공한 역모(쿠데타)는 인정받아야 하는가,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어요. 실패한 정의의 뒷모습을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단종 얘기와 흡사한 거죠. 그래서 운명처럼 끌렸나봐요.” 계엄과 탄핵을 거친 ‘현재’와도 연결되냐는 물음에 장 감독은 “우연히 시점이 그랬을 뿐, 전혀 의도한 바가 없다”며 “정치 얘기가 아닌 역사 얘길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간 모든 소설과 드라마 속 단종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왕이었을 뿐이지만, ‘왕과 사는 남자’ 속 단종의 모습은 다르다.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진정한 왕의 자질과 리더십’을 깨쳐간다. “실록을 보면 이홍위는 총명하고 학문적 성취가 빨라서 할아버지인 세종이 총애했고, 신료들도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찬탄했다고 나와요. 어릴 때부터 강단도 있었고. 유약하다는 건 역사의 승리자인 수양대군의 시각인 거지요.” 드라마 ‘약한영웅’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 박지훈은 다소 가녀린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눈빛’ 하나로 표현해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애잔한 눈빛과 후반부 결의에 찬 빛나는 눈빛으로 서서히 변화하며 지도자(왕)로서의 ‘각성’을 드러낸다.
상상력의 정점에 선 캐릭터는 엄흥도다. 실록에 전하는 그의 행적은 ‘노산군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곡하고 스스로 관을 준비해 장사를 치렀다’는 단 한 줄이 전부다. “단종의 죽음에 관해 ‘자살했다’ ‘사약을 받았다’ 등 여러 버전이 전하는데, ‘연려실기술’에 ‘모시고 있던 통인이 목을 졸랐다’는 내용이 나와요. ‘단종을 유배지에서 최후까지 모신 사람과 장례를 치른 사람이 동일인이라면?’이란 가정에서 엄흥도란 캐릭터가 탄생했죠.”
엄흥도 역의 배우 유해진은 2시간 내내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한다. 100가지 다양한 결의 웃음을 주다가 마지막 눈물을 뽑아내는 것까지 ‘유해진이 유해진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시나리오 수정 단계부터 친구이기도 한 유해진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어요. 사실 그가 바로 오케이해 캐스팅이 확정되면서 100억원대의 투자를 받는 게 가능했어요.” 코미디와 정극을 유연하게 타고 넘는 연기는 유해진의 30년 내공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터다. ‘마을이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엄흥도가 왕으로서의 이홍위에게 스며드는 변화가 작위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건 유해진의 연기가 뿜어내는 설득력 때문이다.

‘왕과 사는 남자’에는 주연인 엄흥도 역의 유해진 외에 연극·뮤지컬·드라마를 넘나드는 전미도가 단종을 보필하는 궁녀 매화 역으로 출연했다. 쇼박스 제공
이 영화의 특이점 중 하나는 단종의 대척점에 선 수양대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악역은 한명회(유지태)가 담당한다. 100㎏까지 벌크업을 한 유지태는 압도적인 비주얼과 나지막하면서도 우렁찬 딕션(발성)으로 극을 압도한다. 흔히 한명회는 칠삭둥이에 꾀죄죄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그려지는데, 그 역시 후대에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게 장 감독의 설명이다. “한명회가 연산군 생모 사사 사건으로 촉발된 갑자사화(1504년) 때 부관참시를 당한 후 만들어진 겁니다. 당대 기록엔 ‘키가 크고 얼굴에 광채가 나 모두가 우러러봤다’거나 ‘무예가 출중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집안도 좋아요. 조선 개국공신이자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의 손자이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한기의 아들입니다. 본인이 급제를 못했을 뿐. 처음부터 덩치 좋은 배우를 물색해 유지태 배우를 만났는데, ‘비질란테2’를 준비 중이라 더 커져 있는 거예요. 하하하. 결과적으로 영화에 더 잘된 일이었죠.”
주연급 캐스팅에만 공들인 것이 아니다. 영화 내내 광천골 주민 한 명, 한 명뿐 아니라 대사가 없는 단역까지 단 한 명도 어색함 없이 극에 녹아든다. 안재홍·이준혁·오달수·박지환 등 베테랑 배우들이 캐릭터의 맛을 돋우고, 유해진의 고향인 충북 청주 ‘청년극장’ 소속 연극배우들이 나머지 여백을 매끈하게 메운다. 가장 놀라운 건 엄흥도의 아들로 출연한 태산 역의 배우 김민이다. 유해진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이홍위와 태산이 또래였으면 했어요. 실제로 두 배우가 동갑인 거로 알아요. 잘생긴 배우가 (유해진) 아들로 나오면 너무 공감이 안 되잖아요? 뭔가 개량형 유해진 같은 느낌을 원했달까, 하하하. 배우 상견례 하는 날 유해진 배우가 김민을 보더니 ‘네가 내 아들이구나?’ 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하.”
‘왕과 사는 남자’엔 극의 흐름을 바꾸는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이홍위와 마을 주민이 호랑이와 마주치는 신인데, 호랑이 컴퓨터그래픽(CG)이 다소 아쉽다는 평가도 나온다. “호랑이는 산중의 왕, 이홍위는 나라의 왕이죠. 호랑이와 맞닥뜨렸을 때 누가 진짜 왕인지를 겨루는 장면인데, 굉장히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데다 극의 터닝포인트이기도 해요. 호랑이 털 한올 한올을 살리는 데 몇 달이 필요한데 후반 작업에 시간이 부족해서….”

‘왕과 사는 남자’ 속 단종 이홍위는 다른 드라마나 소설 속 유약하고 어린 왕이 아닌, 광천골 주민들과의 교류 속에서 진정한 왕의 자질을 깨쳐 나가는 강단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쇼박스 제공
또 한 신은 이홍위가 주민들과 겸상하며 밥을 나눠 먹는 장면이다. 연이어 나오는 이 장면은 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농경사회이던 조선에 쌀밥은 ‘권력’의 다른 말이에요. 벼슬도 쌀로 내리고, 녹봉도 쌀로 내리고, 논 몇 마지기가 있냐가 권력을 상징하죠. 그 귀한 쌀밥, 내 밥그릇을 내어준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봤어요. 엄연한 신분사회에서 왕과의 겸상은 말이 안 되지만, 마을 사람 개개인과 정을 나누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죠. 광천골 주민들과 밥을 나눠 먹지만, 정서상 관객과 겸상하는 느낌? 딱히 대사 없이 배우들이 준비해온 애드리브로 채워진 장면입니다.”
배경에도 공을 들였다. 첩첩산중 광천골 촬영을 하면서 가능하다면 단종의 진짜 유배지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강원도 영월에서 촬영하고 싶었단다. 실제 유배지인 청령포와 비슷한 지형을 찾다가 그 지류 중 한 곳에서 배소(유배지) 촬영을 했다. “배소는 길이 없어 토목공사까지 해서 길을 내어 촬영했어요. 큰 차도 못 들어오는 곳에 배소 오픈세트를 지었죠. 배소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많았는데, 누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라 촬영팀과 배우들뿐이었죠. 마을과 관아 장면은 경북 문경에서 촬영했어요.”
영화는 제작비 105억원, 극장 손익분기점은 약 260만 명이다. 한국 영화 침체기에 100억원대 사극은 매사에 긍정적인 장항준 감독에게도 ‘모험’이었다. 하지만 스타트를 잘 끊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설을 겨냥해 개봉을 선택했다. “한국 영화계 자체에 이 작품의 성공 여부가 매우 중요할 듯싶어요. 투자받은 것 자체도 행운이라 유해진 배우랑 ‘촬영도 못 들어간 동료들, 영화 엎어진 동료들에게 미안해하고 책임감 갖고 찍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죠. 경쟁작이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2월11일 개봉)인데, 서로 문자로 ‘설 연휴에 쌍끌이 해보자’고 격려했어요. 사실, 저 떨고 있어요. 하하하.”
‘작품으로 얘기하는 감독은 언변이 부족하다’는 편견과는 거리가 멀게 장항준 감독은 오락·예능을 종횡무진하며 입담을 뽐내왔다. ‘예능 출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이번 영화를 앞두고는 ‘입담’을 큰 장점이라 여긴단다. “봉준호·박찬욱 감독님 외에 영화감독이 작품을 홍보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잖아요? 사극 장르라 감독이 예능 나와 까불거리면 안 되는데, 영화를 위해 몸을 내놓으라면 내놔야죠. 하하하. 개봉 당일(2월4일) ‘유 퀴즈(온 더 블럭)’에서 먼저 불러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사실상 2026년을 여는 첫 대작 영화다. 2억 명이 넘던 연간 극장 관객 수가 1억 명 수준으로 반토막이 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공세에 유명 감독들도 넷플릭스로 향하는 때에 극장을 겨냥한 사극을 들고 온 장항준 감독의 용기와 책임의식이 도드라져 보인다. “실록이 기록하지 않은 단종의 뒷얘기라는 소재이기에 교육적으로도 좋고,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기에 따뜻한 영화예요. 일반 관객 시사평 중 ‘어렵지도, 유치하지도 않아 온 가족이 함께 보기에 딱 좋은 영화’라는 한 줄이 그렇게 마음에 들더라고요. 하하하.”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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