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요리사’는 생존과 탈락이 비정하게 나뉘는 적자생존의 세계다. 넷플릭스 제공
*이 글은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의 주요 장면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 시즌2를 보느라 잔뜩 긴장한 몸이 ‘냉장고를 부탁해 since 2014’(이하 냉부)를 보면서 스르륵 풀린다. 문득 2026년 새해와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흑백보다는 냉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흑백의 세계는 일단 비정하다.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공정하게 설계된 룰 속에서 경쟁의 결과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룰을 벗어난 행동은 결코 허용되지 않고, 누군가를 돕는 일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음식을 최대한 엄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목표인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내리고 결과를 정한다. ‘가장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팀원을 방출하게 하거나(시즌1), 조금 전까지 팀을 이뤘던 상대와 일대일 대결을 치르게 한다(시즌2). 경쟁이 끝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한다. 이 시리즈의 ‘흑백’은 계급 차이를 드러내는 말이지만, 동시에 생존과 탈락으로 날카롭게 나뉜 이분법의 세계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 시즌2에서 흑요리사와 백요리사가 대결할 재료를 고르기 전 장면. 넷플릭스 제공
그리고 흑백의 세계는 과도하게 거창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무대장치로 가득하다. 백수저들이 흑수저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조리대가 무대 밑에서 올라오고, 오직 심사위원과 참가자만이 존재하는 차갑고 고요한 방이 있고, 식재료를 정하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식재료를 넘치게 쌓아 산을 만들고, 심사위원 100명이 흑백으로 나뉜 가면을 쓰고 앉아 있는 식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정도의 조명과 무대장치가 매화 등장해 시청자를 압도한다.
흑백은 이미 일가를 이룬 요리사들(백수저)과 실력은 있지만 명성이 백수저에 미치지 못하는 요리사들(흑수저)이 오직 음식의 ‘맛’을 기준 삼아 경쟁하는 포맷이다. 흑백은 시종일관 참가자들을 가르고 나누며 경쟁을 붙인다. 거의 곡예라고 해도 좋을 수준의 고난도 미션에 참가자들을 몰아넣고, 참가자들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살아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흑백의 세계는 말하자면 ‘공정하고 치열하게 경쟁해서 적자만 살아남는 세계’다. 이 세계가 주는 중압감이 나를 너무 긴장케 해서, 차라리 결과를 미리 알아버리고 마음 편히 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도 편히 보기 어렵다.
흑백에 비하자면 냉부의 세계는 담백 그 자체다. 가정집 같은 느낌의 스튜디오, 가정집 부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적당한 조리대, 게스트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 집 냉장고에도 있을 법한 평범한 식재료, 요란한 무대장치는 당연히 없고, 냉철한 심사위원도 없다. 게스트의 평가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만, 승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별 장식을 하나 더 다는 것뿐이고, 패자는 다음주 방송에도 어김없이 출연한다.
냉부도 요리사들이 나와 음식을 만들고 평가받는다. 포맷이 흑백에 버금갈 정도로 난도가 높다. 조건의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흑백보다 더욱 난도가 높을지도 모른다. 요리사들은 게스트의 냉장고 속 재료만을 활용해 게스트가 제시한 콘셉트에 맞게 15분 만에 요리를 완성해내야 한다. 15분이라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감자 서너 개 씻고 깎고 채 썰면 끝날 시간인데, 요리사들은 굉장한 요리를 뚝딱 해낸다. 그것도 때로는 두세 개씩이나. 그래서 냉부 출연자 중 흑백에 출연한 요리사들은 “냉부에서 모래주머니 차고 요리하다가 흑백 갔더니 몸이 가볍더라”라고 농담할 정도다.

‘냉장고를 부탁해’ 진행자 김성주·안정환. 제이티비시 제공
냉부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자이지만, 김성주·안정환 두 진행자와 요리를 구경하는 다른 요리사들은 요리하는 사람이 대단해 보일 즈음마다 농담으로 김을 확 빼버린다. 이건 특히 시즌2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인데, 흑백에서 냉철한 승부사의 기질을 드러낸 최현석 셰프는 냉부에서 최고의 승률을 자랑하면서도 ‘오십견이 있는 허셰프(허세+셰프)’ 정도로 격하된다. 흑백 시즌1의 우승자이자 넘치는 자신감으로 ‘건방져 보인다’는 원성도 들었던 권성준 셰프는 냉부 초기에 같은 캐릭터를 유지하려 했지만 제작진과 엠시(MC)의 맹공(?)으로 어느새 캐릭터를 포기하고 이제는 막내 라인의 겸손한 일원이 되었다.
냉부에는 ‘압도’와 ‘거창’이 없다. 혼자 요리하다가 허우적거릴 때면 자연스럽게 구경하는 요리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구경하는 요리사들도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이 망가진 믹서를 고쳐주고, 요리사가 놓친 과정을 짚어주고, 이것저것 훈수도 늘어놓는다. 정신없이 요리하다가 뭔가를 빠뜨리거나 시간을 못 맞추는 일도 허다한데, 그럴 때면 출연자들은 시간이 종료된 이후라도 실수를 보완하거나 조금 더 시간을 쓸 수 있도록 은근슬쩍 눈감아준다. 요리사들도 ‘반칙’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제작진도 그런 모습을 얄미워 보이게 담아내는 법이 없고, 귀여운 유머 포인트로 잡아낸다. 그래서 냉부 자체가 가끔은 경쟁의 탈을 쓴 시트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스트는 객관적 기준을 갖춘 평가자가 아닌 주관적 취향을 가진 손님으로서 자기 앞에 놓인 두 음식 중 그저 ‘더 좋았던 음식’을 고른다. ‘더 완성도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냉부에선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흑백이 ‘공정하게 경쟁해서 적자만 살아남는 세계’라면, 냉부는 ‘공정하게 경쟁하되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곧장 탈락한다는 두려움은 냉부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경쟁 상대를 반드시 꺾어내야 한다는 적대감 역시 없다. 그럼에도 냉부에서의 경쟁이 형식적이거나 시시한 것이 되진 않는다. 경쟁은 여전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하다. 그러면서도 협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경쟁이 반드시 무언가 성과를 얻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낯설고 비현실적인 경험이 냉부에서는 매주 현실적으로 재현된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예능이라면 ‘삼시세끼’도 있다. 연예인들이 시골 마을에 내려가 자급자족한 식재료로 밥을 해먹는 포맷이다. ‘삼시세끼’의 세계에 경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의 고뇌와 시름 같은 것도 없다. 세계와 차단된 평화로운 모처에서 밥을 짓고 나눠 먹으면서 힐링하는 것이 이 예능의 전부다. 우리는 이 세계가 판타지임을 잘 안다. 그 때문에 성공한 것이지만, 어딘가 꼬인 마음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냉부는 ‘삼시세끼’의 ‘힐링’과 흑백의 ‘킬링’(killing) 사이, ‘삼시세끼’의 ‘판타지’와 흑백의 ‘하이퍼리얼리즘’ 사이에서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하나의 샛길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예능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샛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 샛길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결국 하나의 믿음일 뿐이고, 단지 우리가 오랜 좌절과 낙담 끝에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은 아닌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냉부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지만, 흑백과 냉부의 세계 중 냉부의 세계가 ‘더 좋다’고 말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냉부의 고정 패널인 정호영 셰프가 흑백 시즌2 참가 경험을 이야기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냉부에서 요리 제목을 소개할 때마다 매번 행복한 표정으로 춤과 노래를 곁들인다. 그에겐 흑백이라는 무대가 너무 무거웠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아무도 제게 춤을 원하지 않았어요.” 웃자고 한 말이지만, 그 말이 냉부와 흑백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춤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와 마음껏 춤출 수 있는 세계. 요리의 본질은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고정 패널인 정호영 셰프(오른쪽)는 냉부에서 요리 제목을 소개할 때마다 매번 행복한 표정으로 댄스와 노래를 곁들인다. 제이티비시 제공

‘냉장고를 부탁해 since 2014’의 고정 패널인 정호영 셰프가 말했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아무도 제게 춤을 원하지 않았어요.” 넷플릭스 제공

흑백요리사에서 시리즈 내내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 57년 경력의 후덕죽 셰프. 넷플릭스 제공
하지만 이렇게만 정리하기엔 흑백이 보여준 어떤 경이로운 순간들이 있다. 흑백에서도 세계의 규칙을 깨고 나오는 존재들이 있다. 비정하고 잔인한 룰 세팅, 고난도 미션, 거창한 무대장치. 흑백의 세계는 끊임없이 참가자들을 압도하며 서바이벌형 인간으로 재탄생하라 요구하고, 실제로 어떤 참가자들은 기꺼이 그 역할을 자처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아는지 모르는지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경쟁 프로그램에서 수행으로서의 요리를 재정의한 선재스님. 넷플릭스 제공
시즌1에서 준우승자 에드워드 리 셰프가 꼭 그런 길을 갔다. 그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 대신, 태어난 지 1년 만에 떠난 자신의 뿌리로 되돌아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흑백을 재구성한다. ‘백수저에 비해 명성이 부족한 흑수저가 결승전에서 자신의 본명을 공개한다’는 서사를 역이용해 ‘백수저인 나에게도 다른 이름이 있다’며 한국 이름 ‘이균’을 공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균은 마지막 미션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메뉴가 아니라 자신의 서사와 가장 어울리는 메뉴를 골랐다.

흑백요리사 시즌1에 이어 시즌2에 ‘히든 셰프’로 출연해 우승 소감으로 ‘전국의 요리하는 셰프’와 마음을 나눈 최강록 셰프. 넷플릭스 제공
시즌2 시청자는 ‘백수저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고 입 모아 이야기한다. 도전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흑수저들과 달리, 이미 대가를 이룬 백수저들은 좀더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까. 57년 경력의 후덕죽 셰프는 시리즈 내내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조리명장 박효남 셰프는 탈락 뒤 인터뷰에서 “떨어진 사람이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로 경쟁의 의미를 바로 세웠다. 선재 스님은 “음식 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나왔다”는 말로 서바이벌이 아니라 수행으로서 요리를 재정의했다. 최강록 셰프는 “전국에 숨어서 열심히 음식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우승 소감으로 “허상”의 세계를 깨고 진짜 세계로 시야를 넓혔다.
흥미롭게도 흑백의 제작진 역시 어느 순간부터 요리사들의 이런 태도에 더욱 주목한다. 여전히 룰은 비정하고 무대장치는 압도적이지만, 더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메인 서사가 아니게 될 수밖에 없는 경이로운 전환의 순간. 세계는 이런 식으로도 깨어진다.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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