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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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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필은 쌍쌍메들리어라

모래내시장 지하 카바레에서 펼쳐진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송년파티
등록 2020-01-09 11:12 수정 2020-05-03 04:29
2019년 마지막 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안 카바레 쌍쌍메들리에서 송년파티가 열렸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2019년 마지막 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안 카바레 쌍쌍메들리에서 송년파티가 열렸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쌍쌍메들리. 2019년의 마지막 밤을 이런 데서 보낼 줄은 몰랐다. 거긴 포털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안에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사연은 지난 초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이하 구남)가 새 음반을 냈다. 록·일렉트로닉·트로트 등을 뒤섞은 구남의 전매특허 ‘뽕끼 그루브’는 여전히 출렁출렁 넘실댔다. 누구라도 덩실덩실 춤추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성의 선율. 멤버들이 다 빠지고 조웅(보컬·기타) 혼자 남았어도 구남은 구남이었다.

인터뷰를 청하려고 조웅에게 전화하니 모래내시장으로 오라 했다. 경의중앙선 가좌역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니 모래내시장이 나왔다. 과거 서울 서부에서 손꼽히는 재래시장이었으나 근방이 재개발되면서 3분의 1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시장 복판 정육점이 있는 낡은 건물 2층에 올랐다. 간판도 없이 ‘초보운전’ 스티커만 달랑 붙은 철문이 나왔다. 조웅이 문을 열어줬다. “초보운전은 뭔가요?” “여기가 찾기 힘들잖아요. 배달원이 맨날 못 찾겠다고 해서 문패 대용으로 붙였어요. 다이소 가서 그냥 적당한 스티커를 샀어요.” ‘오래된 남자와 여자가 스텔라(현대자동차가 1980~90년대 생산한 승용차)를 탄다’는 뜻의 밴드 이름과 왠지 어울렸다.

‘초보운전’ 스티커 붙은 대문

조웅은 2018년 초 모래내시장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시끌벅적하고 번잡한 서울 홍익대 인근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오고 싶어서였다. 와보니 공기도 사람들도 달랐다. 할머니 동네에 온 것 같은 푸근함이 있었다. 방음도 안 되는 곳에서 창문까지 열고 연주해대며 새 음반 작업을 했다. 그래도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녹음까지 마치고 더는 연주를 안 하니 “요즘 잘 안 되나? 음악 소리가 안 들리네” 하고 걱정해준 사람은 있었다. 조웅은 음반 제목을 《모래내판타지》라 붙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다. 음반 발매 파티도 모래내시장 안 카바레 쌍쌍메들리에서 열었다. “여기서 나온 음반이니 여기서 축하하고 싶었어요. 시장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가보고 단골이 된 곳인데, 사방이 거울이고 바닥이 미끌미끌해서 춤추기 얼마나 좋은데요. 여기를 빌리려고 카바레 사장님을 한 열 번은 찾아가서 설득했다니까요. 파티에 온 지인들도 엄청 좋아하면서 춤을 췄어요. 모르고 오신 카바레 손님들도 이게 뭔가 하다가 어울려 노셨죠.” 그런 파티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무릎을 쳤다. 다음에 또 쌍쌍메들리에서 공연하면 꼭 불러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잊을 만할 즈음, 조웅에게서 연락이 왔다. 2019년 12월31일 밤 쌍쌍메들리에서 송년파티를 한다는 것이었다. 구남을 비롯해 백현진, 김오키 새턴발라드, 까데호가 공연하고 디제이 타이거디스코가 디제잉을 한다고 했다. 2019년의 마지막 밤을 집에서 조용히 보내려던 나는 계획을 급변경했다. 이런 기회는 또 만나기 힘들 것 같았다. 2019년 마지막 퇴근을 하고 모래내시장으로 향했다.

닭발집 옆 어딘가, 사방이 거울인 희한한 곳

문제는 쌍쌍메들리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만난 골목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문 닫은 떡볶이집을 지나니 불을 환히 밝힌 닭내장집이 나왔다. 철판에선 빨간 양념의 닭발이 익어가고 있었다. 소주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니 색이 바랜 쌍쌍메들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노래방 입구처럼 생긴 문에는 미러볼 아래 춤추는 남녀 한 쌍이 그려져 있었다. 문을 여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말 그대로 별세상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천장에서 은하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벽에 붙은 거울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주었다. 영화 에서 시공간이 왜곡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매슈 매코너헤이가 된 기분이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테이블이 제법 많았다. 시골 다방에서나 볼 법한 작은 소파에는 궁서체로 ‘쌍쌍’이라고 쓰인 흰 천이 씌워져 있었다. 기둥에 붙은 메뉴판에는 삼겹두부김치, 과메기, 골뱅이, 인삼새우튀김, 생율인삼 등이 적혀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맥주상자가 쌓여 있었다.

놀라운 건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대부분 20대였다는 사실이다. 세상 ‘힙’한 이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지도 애플리케이션에도 안 나오는 지하 카바레에서 맥주를 큰 병째 홀짝대고 있었다. 힙스터들은 패션도 남달랐다. 긴팔 티셔츠 위에 파랗고 노란 하와이안셔츠를 겹쳐 입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1990년대 초반 옷깨나 입는다는 이들 사이에서 주름잡던 청바지 브랜드 ‘마리테 프랑수아 저버’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티셔츠를 입은 이도 있었다.

스테이지에선 김오키 새턴발라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카바레에 어울릴 법한 달짝지근한 색소폰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김오키는 김오키였다. 드레드록(레게머리) 스타일에 비니를 눌러쓴 김오키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피치를 올리더니 폭풍처럼 몰아치듯 색소폰을 불었다. 그에 맞춰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도 비등점으로 끓어올랐다. 영화 속 재즈 뮤지션들의 잼(즉흥) 연주가 부럽지 않았다. 그들에게 라이트하우스가 있다면, 우리에겐 쌍쌍메들리가 있었다.

놀다 지치면 시장 우동 한 그릇

중간에 배가 고파 잠깐 나왔다. 시장 골목에서 4천원짜리 우동을 사먹었다. 허름한 우동집 텔레비전에선 지상파 이 방송되고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그룹들이 비현실적으로 반짝거렸다. 차라리 쌍쌍메들리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쌍쌍메들리로 돌아오니 백현진이 노래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저기 모서리가 있네/ 세 갈래 빛이 거기서 고요히 흐르네/ 그 빛을 따라 고개를 젖히니/ 창문 밖에 있는 태양이 보이네/ 그 태양 아래에는 바로 네가 서 있네/ 너로부터 오묘한 다정한 세 갈래 빛이/ 내 눈 속으로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아주 깊숙이 스며서 머무네/ 머무네 머무네 온통 머무네” 백현진이 얼마 전 발표한 새 음반 《가볍고 수많은》의 수록곡 이었다. 슬프면서도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오묘한 노래에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그 안으로 스며들어 몸을 흔들었다. 천장에서 세 갈래가 아니라 천 갈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2020년 새해를 밝히는 빛이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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