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꺼내기 쑥스럽지만 습작처럼 노래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2011년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이호진의 개러지밴드’라는 강좌를 들었다. 애플 컴퓨터에 깔린 ‘개러지밴드’ 프로그램을 이용해 음악을 만드는 커리큘럼 강좌였다. 수강생들과 밴드를 결성하고 노래를 만들어 음원을 녹음하고 최종 발표, 공연까지 하는 게 목표였다. 대학생 한 명과 직장인 둘이 모여 ‘시은이와 직딩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한 우리는 두 곡을 만들어 공연하기로 했다.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바뀌는 마법나는 한 곡을 맡았다. 공연까지 시간이 빠듯했다. 코드 세 개만 알면 충분하다는 펑크 정신에서 반발짝 더 나아가 코드 네 개를 반복하는 단순한 구조를 짰다. 중학생 시절 통기타를 독학할 때 처음 연습한 곡이 양희은의 이었다. C-Am-Dm-G7 네 개 코드만 반복하는데도 기막히게 아름다운 명곡이다. 나도 그런 곡을 만들지 말란 법은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꿈틀댔다. 기타로 코드 네 개를 반복 연주하며 흥얼흥얼 멜로디를 붙여나갔다. 얼추 그럴싸하게 들렸다.
며칠에 걸쳐 곡을 만들고 나니 데드라인까지 하루가 남았다. 직업이 글쓰기인데 가사야 금세 쓰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가사가 너무 안 써졌다. 어떤 얘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했다. 결국 시간에 쫓겨 후다닥 급조했다. 여기 옮겨 적기도 민망하나 나쁜 예를 든다는 의미로 기록에 남긴다. 제목은 .
“어제도 한 바퀴 오늘도 한 바퀴/ 내일도 한 바퀴 쉬어도 한 바퀴/ 똑같이 돌아가는 쳇바퀴 같은 내 삶/ 초점을 잃어버린 흐릿한 눈동자/ 그 옛날 나의 꿈은 이런 게 아니잖아/ 줄 끊긴 풍선처럼 날아가고 말았어/ 그런 게 인생이라 어설픈 충고는 마/ 선로를 이탈하고 폭주하는 기관차/ 워워어 라를라 상관 마 뒤집혀도/ 워워어 라를라 이제야 숨이 트여”
아아아, 지금 봐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함과 사고의 빈약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작사의 어려움을 새삼 절감했다.
지난해 늦여름이었다. 친구인 싱어송라이터 조동희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조동희 작사학교 ‘작사의 시대’ 1기 졸업 발표회를 한다고 했다. 조동희는 곡도 잘 쓰지만 탁월한 작사가로서 더욱 빛난다. 그는 1993년 조규찬 1집 수록곡 의 작사가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의 작사 실력은 1997년 장필순 5집 타이틀곡 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 가사를 여기 옮기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나쁜 예와 상반되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에 또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헤어진 사랑에 대한 마음이 식어가지만 가끔씩 찬 바람 불고 외로워질 때면 네가 생각난다는, 뻔할 만큼 보편적인 내용을 어찌 이리 특별한 노랫말로 조탁할 수 있을까. 그 비결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졸업 발표회장으로 향했다.
마음 깊이 숨어 있는 노랫말그곳엔 7명의 1기 졸업생이 있었다. 같은 곡에 자신만의 가사를 붙여 직접 노래하는 방식으로 발표회가 진행됐다. 큰 주제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각자 노래하는 사랑의 형태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모두 달랐다. 누구는 엄마와 할머니 얘기를 했고, 누구는 어항에서 거친 바다로 나아가는 물고기 얘기를 했다. 그 안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서사와 감동이 있었다. 그들은 노랫말을 완성하기까지 짧지 않은 숙성의 기간을 거쳤다고 했다. 약물·알코올 중독자들이 모여 자기 고백을 하는 영화 속 장면처럼 서로 속마음을 꺼내어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고 했다. 오래전 내 경험을 떠올렸다. 그때 난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러니 공허한 가사가 나올밖에. 하고픈 말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려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야 잘 익은 노랫말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라는 책을 읽었다. 재즈·크로스오버 색깔이 짙은 레이블 JNH뮤직의 이주엽 대표가 쓴 책이다. 신문기자를 하다 음악이 좋아 직장을 관두고 레이블을 차린 그는 18년 동안 묵묵히 한길을 걸어왔다. 그는 작사가로도 활약했다.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의 가사를 그가 썼다. “꽃잎 날리네 햇살 속으로/ 한세상을 지낸 슬픔 날리네/ 눈부신 날들 가네 잠시 머물다 가네/ 꽃그늘 아래 맑은 웃음들 모두 어디로 갔나/ 바람 손잡고 꽃잎 날리네/ 오지 못할 날들이 가네/ 바람길 따라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라는 노랫말은 한 편의 시다.
언어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그가 이제야 낸 첫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노래의 꿈은 문학과 음악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 노래를 찾아다녔다. (…) 가사는 지면이 아니라 허공에서 명멸한다. 써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다. 읽지 말고, 듣고 불러봐야 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가사인지를.” 또 하나를 배웠다. 가사는 눈이 아니라 귀와 입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여기서 다룬 40여 곡을 귀로 듣고 입으로 불렀다. 노랫말의 위대함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노랫말을 찾아서언급하고 싶은 노래가 차고 넘치지만, 지면 제약으로 한 곡만 소개할까 한다. 1980년대 조동익·이병우가 결성한 포크 듀오 어떤날의 이다. 이병우가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이 곡은 이주엽의 표현대로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하고, 소박하면서도 풍요롭다”. 노랫말을 옮겨 적는 대신 지금 당장 들어볼 것을 권한다. “7분이 넘는 이 노래가 끝나면 일요일이 저무는 게 아니라, 한 계절이 저물고 한세상이 닫히는 듯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위대한 가사뿐 아니라 이주엽의 정갈한 미문에도 질투를 넘어 경외심이 생긴다. 나로선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절망하진 않는다. 다만 나는 나의 노랫말을 써볼까 한다. 작사의 시대 신입생으로 들어가볼까 생각 중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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