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기로운 의사생활> 포스터. tvN 제공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이 끝났다. 티브이엔(tvN)에서 방송한 12부작 의학 드라마다. <슬의생>이 끝나서 슬프다. 다섯 친구 의사와 수많은 환자·보호자가 부대끼며 빚어낸 이야기에 미소와 눈물을 짓던 순간이 벌써 그립다. <슬의생>의 고갱이는 큰 줄기의 서사가 아니라 소소한 에피소드들이다. 개별 에피소드는 짧고 분절적이지만, 감동의 크기는 분량에 비례하지 않는다. 가벼운 잽에 녹다운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가볍지만 무거운 한 방을 더는 맞을 수 없어 서운하다. 그나마 내년 봄에 ‘시즌2’로 돌아온다는 걸 위안 삼아본다.
소소한 에피소드의 매력… 시즌2 기대
위안이 되는 존재가 또 있다. 드라마에 쓰인 음악이다. 의대 99학번 5인방이 결성한 밴드 ‘99즈’가 들려준 1990년대 명곡들을 무한반복 재생하며 ‘슬기로운 음악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아로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화려하지 않은 고백> <내 눈물 모아> 등 <슬의생> 오에스티(OST) 곡들이 음원 차트 상위권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슬의생> 노래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대 고운 내 사랑>이다. 이 노래는 99즈가 부르지 않았다. 이 노래가 나오는 장면의 배경은 산부인과 분만실이다. 산모의 진통 끝에 아이가 태어나자 곁을 지키던 아빠가 아이를 처음 안으며 부른다. “(아내 출산 때) 노래 하나 해도 될까요? 아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태교로 불러준 노래가 있거든요.” 앞서 아내가 말렸는데도 남자는 기어이 노래한다. “세상에 지쳐가던 내게 그대는 다가와/ 가물어 갈라진 가슴에 단비를 주었죠~”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더 유명한 가수 이정열이 1999년 발표한 원곡을 남자는 성악가처럼 노래한다(실제로는 바리톤 김동규가 불렀다고 한다). 묵직하면서도 포근한 노래가 축복의 성가처럼 온 병원을 감싸는 순간, 불현듯 11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아내의 신음이 유난히 길고 높았다. 아내 손을 움켜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애~ 응애~!” 아기 울음소리에 귀가 번뜩 뜨였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봤다. 2009년 3월5일 새벽 2시20분, 딸아이가 태어났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치밀었다. 눈두덩이 뜨거워지고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내 허리께 세운 가림막 탓에 아기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즌트 시 러블리?”(그녀가 사랑스럽지 않나요) 1976년 첫딸 아이샤가 태어났을 때, 스티비 원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기 때 시력을 잃은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딸아이의 얼굴을 그리며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송스 인 더 키 오브 라이프》(1976) 앨범에 실린 <이즌트 시 러블리>다. 들머리에 삽입된 아기 울음소리는 아이샤로부터 따왔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선생님, 결심했습니다.” “시신경이 너무 파괴돼 개안수술이 성공하더라도 15분밖에 볼 수 없어요.” “그래도 좋습니다. 수술해주세요.” “지금까지 미루고 안 해온 어려운 수술을 왜 갑자기…?” “아이가 보고 싶어요. 딸아이 얼굴을 15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수술은 실패로 끝났다.
스티비 원더는 끝내 아이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노래는 온 세상을 아이의 얼굴로 수놓았다. 요즘 난 매일 딸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흥얼거린다. “이즌트 시 러블리?”
이 글은 2009년 3월 발간된 <한겨레21> 제752호에 쓴 글이다. 당시 나는 ‘서정민의 뮤직박스 올드&뉴’라는 짧은 꼭지를 1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었다. ‘딸아이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이 글을 끝으로 꼭지는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7년 뒤인 2016년 8월, 제1125호에서 ‘서정민의 뮤직박스’가 부활했다. 그것도 두 쪽짜리 긴 꼭지로.
드라마에선 바리톤 김동규의 묵직한 목소리로
3~4주에 한 번씩 4년 가까이 이어온 글에 딸아이가 등장한 게 두 차례다. 여섯 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아빠 우쿨렐레 잘 친다”고 ‘뻥’을 쳐서 난생처음 잡아본 우쿨렐레를 맹연습해 어린이집 ‘가족의 밤’ 무대에 섰던 얘기, 그로부터 3년 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아이가 우쿨렐레를 가르쳐달라고 하더니 학예회에서 혼자 멋진 무대를 보여준 얘기(제1192호 ‘넌 나의 선샤인’),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태교로 들려줬던 브로콜리 너마저의 <2009년의 우리들> 기억을 떠올리고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이와 함께 브로콜리 너마저 공연에 가서 ‘2019년의 우리들’ 추억을 만든 얘기(제1265호 ‘2029년이 되면 우린’)로 원고를 메웠다. 그리고 지금 또 딸아이 이야기로 이 글을 메우고 있다. 여러모로 효녀 노릇 톡톡히 한 걸 저는 알고 있을까?
다시 <슬의생>으로 돌아와 <그대 고운 내 사랑>을 들어본다. “세상에 지쳐가던 내게 그대는 다가와/ 가물어 갈라진 가슴에 단비를 주었죠/ 잊었던 희망의 노래가 새록새록 솟고/ 그댈 그리며 사는 날들 꿈만 같아요”까지만 해도 이 노래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바치는 노래인 줄로만 알았다. “그대 고운 내 사랑 오월의 햇살 같은 꿈이여/ 그댈 기다리며 보내는 밤은 왜 이리 더딘지” 하는 후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다음이 아리송하다. “그대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외로워하지만/ 가시나무 숲 서걱이던 내 가슴 치우고/ 그대를 쉬게 하고 싶어 내 귀한 사람아” 하는 대목을 곱씹다보면, 신생아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나가면 얼마나 나갈 것이며,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를 벌써 쉬게 하면 어쩌자는 건지 의아하기만 하다.
죽을힘을 다해 아이 낳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아뿔싸. 이 노래는 아이를 위한 게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여자가 창피하다며 극구 말려도 남자는 꿋꿋하게 마음을 전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딸아이에 대한 글은 썼어도 아내에 대해선 쓴 적이 없다. 이렇게 마지막에나마 깨달아 다행이다. “그동안 짊어진 삶의 무게에 얼마나 힘들었나요? 앞으로 내가 더 많이 나눠 질 테니 함께 쉬엄쉬엄 갑시다. 사랑합니다.” 귀한 지면을 빌려 더 귀한 그대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
서정민 <한겨레>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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