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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에 이 오디션을 보여주고 싶다

우승자로 호명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감동의 순간, 이것이 진짜
등록 2019-11-28 11:14 수정 2020-05-03 04:29
제1회 전태일힙합음악제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들. 전태일기념관 제공

제1회 전태일힙합음악제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들. 전태일기념관 제공

종종 음악경연대회 심사를 본다. 대부분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신인 음악인들을 선별해 지원하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10월25일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2019 인디스땅스’ 결선 무대도 그랬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이 인디 뮤지션 발굴·육성을 위해 4년째 진행해온 프로젝트다. 올해는 역대 최다인 446팀이 몰렸다고 한다. 지난 7월부터 치러진 서류·영상 심사, 예선과 본선 공연을 거쳐 최종 결선에 오른 5팀이 이날 무대에 섰다.

실력 있는 팀들을 왜 진작 몰랐을까

림하라, 마빈, 두, 코스모스, 프롬올투휴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팀인데도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공연을 보면서 호기심은 자책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실력 있는 팀들을 왜 진작 몰랐을까?’ 심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팀이 우승팀이다 싶으면 다음 팀이 더 잘했다. 심사표에 적는 점수가 계속 치솟았다.

최종 선택을 받은 팀은 코스모스였다. 3인조 일렉트로닉 록밴드로, 리드기타 대신 신시사이저를 내세운 음악을 들려줬다. 록에 일렉트로닉을 접목한 밴드들은 경쾌하고 신나는 댄스음악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은 달랐다. 우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코스모스는 지난해에도 인디스땅스에 도전해 본선 무대까지 올랐으나 최종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1년간 밴드를 재정비하고 다시 도전한 끝에 최종 우승 상금 1천만원을 거머쥐었다. 그동안 절치부심해서였을까? 우승자로 호명되는 순간,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보는 나도 덩달아 울컥했다. 경연대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게 경연대회다. 승자는 뒤풀이에서 기쁨의 잔을, 패자는 아쉬움의 잔을 삼키는 법이다. 그런데 모두가 기쁨의 잔을 나누는 경연대회가 있다. 올해 30회를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다. 1987년 11월1일 교통사고로 숨진 천재 싱어송라이터 유재하를 기리고자 아버지가 사재를 출연해 만든 유재하음악장학회가 발단이었다. 1989년 열린 제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의 영예는 조규찬에게 돌아갔다. 보통의 경연대회였다면 나머지 참가자들은 낙심했을 터다. 하지만 본선 무대에 오른 10명 모두에게 상과 장학금이 주어졌다. 모두가 우승자인 셈이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는 유재하의 뒤를 잇는 싱어송라이터의 등용문이 되었다. 고찬용, 유희열, 이규호, 이한철, 조윤석(루시드폴),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스윗소로우 등이 이 대회를 거쳐 가수가 됐다. 방탄소년단을 키운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도 이 대회 수상자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출신 음악가들은 2013년 ‘유재하동문회’를 결성했다. 경연대회가 재정난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마치 학교 동문회처럼 선후배들이 똘똘 뭉쳤다. 유재하동문회는 현재 CJ문화재단과 대회를 공동 주관하고 있다.

모두가 기쁨을 나누는 경연대회

11월9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 새천년기념관에서 열린 서른 번째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는 역대 최다인 755팀의 경쟁을 뚫고 올라온 10팀이 출전했다. 대상은 김효진, 금상은 송예린, 은상은 이찬주, 동상은 방랑자메리·제이유나·황세영, CJ문화재단상은 코요, 유재하동문회상은 니쥬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모두 2천만원의 상금을 나눠 받았다. 30기 동문이 된 이들은 대회가 열린 당일 기념 앨범을 발매한 데 이어, 조만간 기념 공연도 할 계획이다. 대회 직후 열린 뒤풀이 자리에서 동문 선배들이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따뜻하게 반겨주었다고 한다. 다 함께 기쁨의 잔을 나누는 전통은 올해도 이어졌다.

이런 유재하음악경연대회를 닮고 싶어 하는 경연대회가 있다. 11월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회 전태일힙합음악제다. 지난 4월 문을 연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이 10~20대가 좋아하는 힙합을 통해 전태일의 정신과 노동의 가치를 설파하고자 만든 경연대회다. 한국 힙합 1세대 그룹 가리온의 MC 메타와 앨범 ≪현장의 소리≫ 등을 발표하며 사회 현실을 노래해온 래퍼 아날로그 소년이 기획에 참여했다. 꼭 전태일과 노동이 아니어도 대회 주제인 사랑·행동·연대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 MC 메타는 “요즘 한국 힙합신에선 진중한 가사가 드물다. 를 보면 ‘스왜그’(자기 과시)와 ‘플렉스’(돈 자랑)에만 쏠려 있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가 진솔하게 자기 얘기를 하는 싱어송라이터의 등용문이 된 것처럼, 전태일힙합음악제가 한국적 정서와 시대상을 품은 래퍼의 등용문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최악의 경연대회는 멈춰야 한다

참가를 신청한 400여 팀 가운데 1차 온라인 예심과 2차 실연 심사를 통과한 12팀이 최종 본선 무대에 올랐다. 이들이 토해낸 랩이 쌀쌀한 대기를 후끈 달궜다. 래퍼 딥플로우·팔로알토·허클베리피의 심사로 3팀이 선정돼, 각각 상금 100만원과 음원 제작·발표의 기회를 얻었다.

우승자 중 하나인 줍에이는 이렇게 랩을 했다. “난 그저 랩이 좋아서 이걸 시작했고/ 금목걸이 그런 거 난 몰라/ 근데 왜 사람들은 티브이 나가서/ 돈을 벌어야지 꼭 다 인정한다는 말투로/ 내 음악은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티브이에 나가보래” 노래 제목은 다. 그는 엠넷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 얼굴을 내밀고 돈을 많이 벌어야만 성공한 래퍼로 보는 세태를 겨냥했다.

이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은 자들이 있다. 등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조작을 일삼은 이들이다. CJ ENM과 엠넷은 돈과 시청률 때문에 아이들의 꿈을 이용했다. 2009년 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쌓아온 오디션 왕국의 아성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엠넷은 내년 초 방영을 목표로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의 지원자 접수를 최근까지 했다. 이들에겐 승자의 기쁨의 눈물도, 패자의 아쉬움의 눈물도, 시청자의 감동의 눈물도 오로지 돈과 시청률의 잣대로만 재단될 뿐이다.

거짓과 조작으로 점철된 최악의 경연대회는 이제 멈춰야 한다. 대신 숨은 보석 같은 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올곧은 경연대회들이 좀더 조명을 받았으면 한다. 꼭 성공하지 않아도 꿈과 희망과 노력 그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음악은 본래 그런 것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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