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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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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리의 이민자 요리, 유병재의 무조건 공감… 올해의 콘텐츠 7선

한겨레21 칼럼 필자 7명이 뽑은 ‘올해의 콘텐츠’
‘이민자 요리’ 에세이·중세 배경 게임·‘무공해’ 유튜브·스탠드업 코미디까지… 2025년의 취향 기록
등록 2025-12-25 21:07 수정 2025-12-31 13:49
스탠드업 코미디언 에밀리 카탈라노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첫 번째 스페셜쇼를 공개했다. 에밀리 카탈라노 유튜브 갈무리

스탠드업 코미디언 에밀리 카탈라노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첫 번째 스페셜쇼를 공개했다. 에밀리 카탈라노 유튜브 갈무리


한 해를 기억하는 방법 중에 “나 작년에 누구랑 어떤 영화 봤어!”처럼 콘텐츠와 연결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방법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 그 콘텐츠를 봤는지, 보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돌이켜보는 건 아련하고도 생생한 경험이다. 한겨레21에 글을 연재하는 필자 7명이 올해 기억에 남는 에세이, 게임, 유튜브, 철학, 다큐멘터리, 드라마 등을 추천했다. 2025년에 새길 나만의 콘텐츠를 꼽아보는 재미도 있겠다.

무표정한 ‘모태신앙’의 반전 스탠드업 코미디

역시 심각하게 진지해본 사람이 심각하게 웃기는 것 같다. 내가 흠모하는 웃기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독실한 믿음을 가진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길래 든 생각이다. 불경하려면 우선 뭐가 존경받는지를 잘 알아야 해서 그런 걸까? 스탠드업 코미디언 에밀리 카탈라노도 그런 경우다. 착실하게 신성을 배워서 훌륭한 신성모독자로 자란 경우. 잘 모르는 무언가를 놀리려는 사람과의 차이가 현격하다. 그의 시그니처는 무대 내내 풀리지 않는 무표정이다. 영상의 어느 부분을 찍어도 그의 표정과 자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마이크는 턱에 고정돼 있고, 일정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좀처럼 겨드랑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도 웃길 때는 입술만 조금 씰룩거린다. 나는 분명 웃는데, 그가 웃기려고 하는지는 확실치 않아서, 멋모르고 성경 캠프에 갔다가 목사님의 치부를 발견한 아이처럼 웃게 된다.

2024년 9월, 에밀리 카탈라노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첫 번째 스페셜쇼를 전부 공개했다. 제목은 고약하게도 ‘언스페셜’(Unspecial). 독립적으로 촬영해 공개한 영상이라서 이제부터는 라면과 희망과 꿈에 의지해 살게 생겼으니 댓글도 좀 남기고 자기를 구독해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고,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한국어 자막이 없는 콘텐츠란 점이 치명적인 단점이라서, 번역의 귀인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서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면 반의반도 안 웃기는 영상이 될까봐 아직은 참고 있다.

 

안담 작가

 

 

액션어드벤처 게임 ‘고스트 오브 요테이’(위부터 시계방향)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스 3’, ‘크루세이더 킹스 3’의 확장팩 DLC(아래 오른쪽).

액션어드벤처 게임 ‘고스트 오브 요테이’(위부터 시계방향)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스 3’, ‘크루세이더 킹스 3’의 확장팩 DLC(아래 오른쪽).


유럽 봉건 가문 체험, 당나라 시험… 게임으로 경험하는 중세시대

게임의 좋은 점은 해보지 않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5년 나온 ‘고스트 오브 요테이’를 하며 일본 에도 막부 초기 홋카이도의 자연을 감상했다. 즐거웠던 홋카이도 여행을 떠올리며…. 물론 묘사된 ‘자연’은 편의적으로 왜곡돼 있다. 아이누 사람들을 아이템 교환용 ‘병풍’으로 만든 점 역시 당시를 제대로 재현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게임을 하다보면 홋카이도의 역사와 아이누의 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을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크루세이더 킹스 3’는 중세·봉건제·상속을 주제로 한다. 물론 중세인의 삶은 게임적으로 축약돼 있다. 그러나 봉토를 가문의 재산으로 유지하려는 백작의 입장이 되면, 평소 안 하던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제가 확립되고 유지돼온 배경이다. 아들들이 땅을 나눠 상속해도 가문이 몰락하는데, 하물며 죽은 아들의 부인이나 며느리나 딸에게? 장자상속은 위대한(?) 발명이었을 것이다. 그 중세적 질서가 현대인의 의식 속에도 이어진다.

이 게임은 최근 동아시아 지역을 추가한 디엘시(DLC·다운로드 가능한 콘텐츠)를 내놨다. 867년부터 시작하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까지다. 출세하려면 당나라에 가서 시험을 계속 보는 등 평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게임에서도 이래야 하나? 왠지 중세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능력주의’를 다룬 책을 뒤적거리게 됐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맞서지 않고 말 건네는 방법 없을까

왜 우리는 늘 대화에 실패할까?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어째서 스캔들로 번질까? ‘스피박 스캔들’ ‘새벽배송 논쟁’ 등 2025년에도 오만과 불신, 상호 무시와 경멸로 인한 대화의 실패는 끝없이 반복됐다. 경멸에 대항-경멸로 맞서고, 대항-경멸에 다시 대항-대항-경멸로 맞서는 악순환. 서로 간에 제대로 된 관계 맺기가 부재했다는 점이 어쩌면 근본 문제일지 모른다. 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펴냄, 2025년)은 이런 헛헛한 마음에 해법을 제시해주는 탁월한 철학책이었다. 스탱게르스는 상대방의 지성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을 제시한다. 경멸 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기꺼이 배울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동료들에게 귀를 활짝 열고, 외부로부터 오는 요구에 응답하고, 그 요구에 영향받고 변형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 고분고분하지 않음, 마찰, 반발, 불협화음을 연구나 정치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연구 대상이자 정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속도를 늦춰야 한다. 빠른 비판은 적을 만들지만, 느린 대화는 동료를 만든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유병재 유튜브 갈무리

유병재 유튜브 갈무리


무조건 공감해주다보니 지어지는 ‘무공해 미소’

진심으로 정성껏 공감했다고 생각하는데 “너 티(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냐! 나 에프(F)야!!!”라고 반박하지만, 어김없이 “F 호소인”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러면 문득 공감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하는 것만이 ‘공감'의 유일한 목적일까?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말을 건네는 것은 ‘공감'으로 분류될 수 없을까? 그렇게 ‘공감'에 갸우뚱한 마음을 품지만, ‘F요정’들이 나를 공감 감옥에 가두고 무한 공감을 해주었으면 하는 날도 있다.

유튜브에서 방송인 유병재가 진행하는 ‘[무공해] 무조건 공감해드림'은 그런 날 필요한 콘텐츠다. ‘무공해'는 라디오 방송처럼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전화를 연결하고, 사연을 들으며 무조건 공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대구 사투리 억양으로 “저 사투리 하나도 안 써요”라고 말해도 무조건 공감해주고,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도 기꺼이 ‘물복' 좋아하는 학생의 편이 돼준다. 듣다보면 자연스레 “뭔데” “꺼져” “얼마나 속앓이가 심했을까?” 같은 공감의 언어 3종 세트 등 공감의 기술을 배운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이 콘텐츠의 백미는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고, 심지어 귀여운 신청자의 사연 자체다. 그 사연을 들으면 저절로 무공해 미소를 짓게 되고, 공해에 가까운 자극적인 말과 일에 둘러싸인 내 일상이 무조건 공감받는 느낌이 든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에드워드 리가 미국에서 만나는 ‘이민자 요리’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의 준우승자 에드워드 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프로그램 출연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는 편지를 공개했다. 그가 부서지는 파도가 되기보다는 한국의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이 되고 싶어졌다고 쓴 구절을 읽을 때면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미국 뉴욕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면 누구나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습니까? 에드워드 리의 회고록 ‘버터밀크 그래피티’(위즈덤하우스 펴냄, 2025)는 식재료와 정체성에 관한 비유가 절묘하게 얽힌 시적 언어를 더 길게 읽을 기회를 선사한다. 미국 곳곳의 이민자가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가는 그의 보법 은 남다르며, 이는 언뜻 보기에 디아스포라 서사의 기본 조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모든 여정은 바로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이루어진 것만 같다. “나는 한 가지만 요리하는 법은 모른다. 내 음식이 언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버터밀크 그래피티’는 성공한 미식가가 세상의 음식을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하는 책이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애쓰지 않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수수한 식당 풍경, 라마단 기간에 맞추어 방문한 미시간에서 금식이 끝나자마자 먹을 음식을 테이크아웃하는 마음, 뉴올리언스 거리에서 풍겨오는 ‘호떡과 먼 친척뻘’인 베녜 향을 생생하게 공유할 뿐이다.

 

서해인 콘텐츠로그 발행인

 

 

경북 안동 문화방송(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두봉 주교’.

경북 안동 문화방송(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두봉 주교’.


“높은 사랑에는 높은 행복이 있습니다”

경북 안동 문화방송(MBC)에서 만든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두봉 주교’를 올해 여러 번 다시 봤다. 하하 웃으면서도 보고 엉엉 울면서도 봤다. 그 다큐가 2024년 10월 말 정식으로 방영되고 5개월 뒤 두봉 주교는 96살의 일기로 선종하셨다.

촬영팀이 주교님을 기록하는 그 과정을 나 역시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안동교구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안동교구청의 요청에 응하며 주교님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완성된 다큐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본 건 정작 주교님이 돌아가신 이후다. 그가 그리울 때마다 유튜브 앱을 열어 다큐를 찾아본다. 카메라에는 담겼으나 다큐에는 들어가지 않은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본다. “묘한 것이 뭐냐 하면 낮은 사랑은 낮은 행복하고 연결돼요. 말하자면 아주 낮게 사랑하면 낮게 행복해요. 더 높은 사랑에는 더 높은 행복이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최고 사랑에 분명 최고의 행복이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최고 사랑을 안다면, 남들에게 최고 행복을 알려주게 될 것 아닌가. 내가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한국에 온 지가 올해로 70년이에요. 그동안 그래도 사랑했고, 행복했다. 언제 세상을 떠날진 몰라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여쭈었는데 두봉 주교님은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드라마 ‘애마’에서 톱스타 정희란 역을 맡은 배우 이하늬.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애마’에서 톱스타 정희란 역을 맡은 배우 이하늬. 넷플릭스 제공


수많은 애마부인 넘어선 2025년의 ‘애마’

‘애마’를 왜 보게 되었을까? 예고편을 보는데, 아무래도 ‘다른’ 애마인 거 같다는 느낌이 왔다. 영화 속 한 장면도 제대로 본 적 없다만, 나는 수많은 애마를 안다. 모두 똑같은 애마다. 시대가 변해도 애마부인을 불러오는 방식은 변하질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애마라니, 그럼 봐야지.

재밌게 봤다. 왜 이렇게 멋져? 왜 이렇게 통쾌해? 1화까진 편히 보지 못했다. 연출과 대본을 믿게 될 때까지는 긴장하며 봤다. 극 초반 ‘여배우’ 희란이 기자들 앞에서 “그간 제가 벗기도 참 많이 벗었잖아요?” 할 때 이미 믿기로 했다만, 그래도 모르니까. ‘성적 대상화’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은 자칫하면 보는 이가 ‘마상’을 입는다. 그렇다면 안 보는 게 최선인데. 구더기 많은 세상에서도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안 담글 수 없으니까. 오늘은 좀 다른 걸 보려나 기대하며 보고, 다른 걸 만들 수 있으려나 희망을 품으며 만든다.

간혹 이 영화가 재미없다는 리뷰를 본다. 그럴 수 있다. 개인 취향이니. 내게 재미있다고 완벽한 작품은 아닐 테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한다. 일본 방송에 출연한 주애에게 진행자가 “목소리에 이미 에로가 가득하네요”라고 했을 때 방청객은 웃었고, 주애는 웃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고, 나는 웃지도 못하면서 미소 지었다. 누군가에겐 영화 속 지나가는 대사였겠지. 어쩌면 다소 지루한. “웃자고 하는 소리였는데”라는 말에 진짜 웃는 사람이 있고, 거짓으로 웃는 사람이 있고,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재미는 개인 취향이자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웃겼다. 그리고 같이 웃어주는 당신들이 있어 좋았다.

희정 기록노동자·‘죽은 다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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