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대척점에 야만이 있다. 도덕적 우위를 가진 쪽이 승리하는 게 역사의 순리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이른바 ‘서방세계’가 ‘침략군 러시아’에 맞서 손쉽게 도덕적 우위를 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국 전략경쟁 과정에서 내세운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란 구도는 러시아를 겨냥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가치’를 공유한 서방세계는 항전에 나선 우크라이나 지원이란 명분 아래 일치단결했다. 하지만 2023년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세력 하마스의 기습공격에 맞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봉쇄 폭격은 이런 서방의 도덕적 우위에 치명타를 날렸다. 폭력과 폭력이 만났을 때, ‘가치’는 실종되고 ‘관성’만 남은 탓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0월18일 텔아비브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나 하마스를 ‘야만’으로 규정했다. 이어 “문명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나 이스라엘 편에 서준 것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이스라엘 국민에게, 또 모든 세계인에게 미국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화답했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은 미국을 비롯한 여타 민주국가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미국은 이스라엘이 자국에 대한 공격에 대응함에 있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맹목적 지지 선언이라 할 만하다.
10월17일 발생한 가자지구 중심가 가자시티의 알아흘리아랍 병원 폭격 참사로 이슬람권 전역이 들끓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10월11~17일 요르단·카타르·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이집트 등을 넘나들며 공들인 미국과 요르단·이집트·팔레스타인자치정부(PA) 간 4자 정상회담이 전격 취소된 것은 심상찮은 중동 정세를 상징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야심작’으로 추진해온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협상도 동결된 모양새다.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미 “팔레스타인 지지”를 선언했고,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폭력 사태 확산 방지 대책까지 논의했다.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종주국을 자임하는 사우디와 이란은 2023년 3월 중국 중재로 7년여 만에 외교관계를 복원한 바 있다.
레바논의 무장 정치세력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제2의 전선’을 만들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사태 발생 초기부터 양쪽 간 크고 작은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 이란 역시 이스라엘 지상군의 가자지구 진입을 경고하며 ‘참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중동 질서가 극한 대결로 치달았던 냉전 시절로 회귀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스라엘과 일찌감치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집트와 요르단 쪽 분위기도 심상찮다. 10월8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현지 경찰이 이스라엘 관광객 2명과 자국인 관광 가이드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선 시위대 수천 명이 이스라엘대사관 쪽으로 접근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양국 모두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걸프 연안국가의 사정은 좀더 복잡해 보인다. 하마스를 후원해온 카타르는 사태 발생 직후 “상황 악화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20년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수교한 바레인과 아랍에미리트는 ‘하마스 비난’ 행렬에 동참했지만, 가자지구 봉쇄·폭격이 장기화할 경우 입장이 달라질 것을 배제하기 어렵다.
애초 한목소리로 하마스를 비판했던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폴리티코> 유럽판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유럽연합 정상회의는 10월17일 가자지구 사태에 대한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긴급 화상회의를 열었지만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하마스의 테러만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폭격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는 탓이다.
앞서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0월10일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심각한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민간인 공격을 규탄한다”며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자국을) 방어할 권리가 확실히 있지만, 이는 국제인도법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덕적 우위’에 바탕을 둔 미국과 유럽연합의 단결이 흔들리고 있다.
피맺힌 절규도 부질없다. 지구촌의 평화와 안전 유지에 대한 ‘1차적 책임’을 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가자지구의 참극을 멈추는 데 아무런 구실을 못하고 있다. 앞서 안보리는 10월16일 러시아가 제출한 결의안을 놓고 첫 번째 표결에 나섰다. 결의안은 △즉각적인 휴전 △민간인 겨냥 폭력 사태 및 테러 행위 규탄 △납치된 (이스라엘) 인질 석방 △식품·연료·의약품 등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 등이 뼈대였다. 표결 결과는 찬성 4표, 반대 5표, 기권 6표로 부결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 3개 상임이사국이 부결을 주도했다. 안보리 결의는 15개 이사국 중 9개국의 찬성과 5개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없어야 통과된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하마스에 대한 비난이 빠졌다”는 점을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그는 “민간인이 참극으로 고통당해선 안 되며, 안보리는 위기 해결의 책임이 있다. 하마스를 단호하게 비난하고, 유엔 헌장에 따른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18일 순회의장국인 브라질이 제출한 두 번째 결의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다. 이번에도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적대행위 중단이 핵심이었고, 하마스에 대한 ‘단호한 비난’도 포함됐다. 12개 이사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러시아와 영국은 기권했다. 그럼에도 결의안은 또 부결됐다. 유일한 반대표는 미국이 던졌다. 상임이사국에 부여된 ‘거부권’이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 및 주변국과 함께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하마스의 행위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려 한다”고 말했다. ‘도덕적 우위’는 사라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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