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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접촉하는 번역, 인간의 자리

인공지능이 줍고 흉내 내고 베끼는 사이… ‘번역의 철학’을 묻다
등록 2026-08-06 22:36 수정 2026-08-1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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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국민 1천 명한테 10가지 직업군을 제시한 뒤 인공지능(AI)에 의한 대체 가능성을 물었더니, 번역가·통역사가 1위로 꼽혔다.(대체 가능성 90.9%) 졸지에 소멸 위기에 몰린 번역가 1천 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번역의 철학’(데이미언 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유유 펴냄)에는 직접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다른 조사 결과가 나왔으리라 추론할 근거는 차고 넘친다.

“번역은 읽기와 연결된 일종의 쓰기이다. 다른 텍스트, 원본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챗지피티는 줍고 고르고 흉내 내고 베끼고 짜깁기할 수 있고 그런 선 안에서 ‘쓸’ 수 있지만, 읽을 수는 없다. (…)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란 사실 ‘읽기’임을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다. 읽기는 개별적 인간이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관여하는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과정이다.”

이런 인식이 번역가의 자기본위적 태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번역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읽기’라는 저자의 인식은 책 전체를 관통하며 치밀하게 논증되고, 어느덧 정언명제 수준에 이른다. 또한 이는 인공지능에 의한 읽기와 쓰기의 교란이 오늘날 인간이 이 세계의 실재와 접촉하지 못하는 개연성을 암시한다.

번역(가)의 세계가 비대중적인 사정과 별개로, 이 책은 대중서가 되기에 적잖이 도저하고 전문적이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말하기를, 번역에 대한 이론서도 번역의 팁을 알려주는 실용서도 아닌 그 공백 사이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포하되 동시에 질문 너머이기도 한 호기심과 사유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만큼에 한해 이 책은 번역 문외한에게 직관적이고 대중적이다.

“번역가는 ‘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를 듣는다면 바흐를 듣는 것이다. (…) 그런데 또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는 것이기도 하다. (…) 번역가가 피아노곡을 색소폰이나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해서 모든 음을 다르게, 다른 악기로 연주되게 바꾼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곡가의 악보를 보며 악기를 선택해 연주하는 것이 ‘읽기와 쓰기’로서의 번역일 터다.

이 은유를 ‘읽기와 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도치한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지도 새롭게 탐문할 수 있지 않을까. 336쪽, 2만2천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21이 찜한 새 책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오가와 사토시 지음, 황금가지 펴냄, 1만7천원

에스에프(SF) 작가이자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 주자가 쓴 작법서는 어떤 통찰을 담고 있을까. 서문에서부터 “‘만인을 위한 소설 쓰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선언이 심상치 않다. 저자는 소설가의 사고술을 낱낱이 해체하며 창작의 신비주의를 걷어낸다. 모호한 생각을 적확한 언어로 풀어내고 싶은 이들에게 지적 쾌감을 선사할 책이다.

 


신성세-초지능 AI의 진화와 인류세의 종언

제임스 러브록 지음, 신인수 옮김, 온마음 펴냄, 2만1천원

인공지능(AI)의 진화 속도는 과학기술의 최첨단에 있는 이들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급진적이고 매섭다.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인 저자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 섬뜩하고도 놀라운 비전을 내놓는다. 그는 초지능 AI와 사이보그들이 인간과 공생하는 신성세(새로운 지구별 시대)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신승철 외 46명 지음, 알렙 펴냄, 2만9500원

사전은 개념의 경계를 정하고 하나의 뜻을 안정적으로 제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전은 뜻을 닫지 않는다. 생태적 현실이 고정된 항목으로 분리하기 어려워서다. 예컨대 숲과 도시는 연결돼 있고, 기후위기는 불평등과 노동의 문제를 통과한다. 탈성장, 탄소세, 비거니즘 등 75개의 개념어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은 관계망을 형성한다.

 


번영의 대가: 인간 문명의 그늘

수닐 암리스 지음, 추선영 옮김, 이봄 펴냄, 3만2천원

미국 예일대학 역사학 석좌교수인 저자는 수십 년간 축적해온 연구를 집대성해 인류 문명사를 혁신과 파괴의 관점에서 써냈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영토 확장부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산업혁명과 세계대전, 도시화, 오늘날 기후위기까지 인류 문명사를 폭넓게 다룬다. 우리가 누리는 번영이 어떤 선택과 대가 위에 세워졌는지 치밀하게 파헤친다.

 

공주경 기자 wnrud12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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