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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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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네 메어, 니 우나 메노스

[독일] 2.5일마다 여성 한 명이 살해당하지만 ‘다른 나라 일’로 여기는 인식,
이스탄불 협약 이후 ‘여성의 집’ 확대
등록 2021-12-19 08:13 수정 2021-12-23 11:09
독일 베를린에서는 30여 개 단체와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 ‘국제 여성연대 네트워크’가 매년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집회를 크게 연다. 2019년 집회 현장 모습. 채혜원 제공

독일 베를린에서는 30여 개 단체와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 ‘국제 여성연대 네트워크’가 매년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집회를 크게 연다. 2019년 집회 현장 모습. 채혜원 제공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021년 11월28일 일요일 오후,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바트빈츠하임 경찰서에 한 남성의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신고받은 가정집으로 출동했다. 그 집에 살던 33살 여성이 피를 흘리며 숨져 있었다. 현장에는 전남편인 41살 남성과 1살도 채 안 된 아기가 있었다. 부검 결과 33살 여성은 흉기로 목과 상체 여러 곳을 찔려 숨졌다. 구속된 41살 남성은 왜 전부인을 찾아가 살해했는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통계 집계하지만 범죄 동기 분석하진 않아

2020년 139명, 2019년 117명, 2018년 122명, 2017년 147명…. 독일에서 2.5일마다 여성 한 명이 살해당하고 있다. 피해자가 여성인 살인미수 사건은 매일 발생한다. 가해자는 현재 파트너이거나 전 파트너다. 파트너에 의한 폭력 문제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연방범죄수사청(BKA) 자료를 보면, 2020년 현재 또는 이전 파트너에게 신체 상해, 성폭력, 스토킹 등의 피해를 본 여성은 11만 명이 넘는다. 여성살해 사건 통계에는 가해자가 기소됐거나 유죄판결 받은 사례만 포함돼 실제 발생한 사건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에서도 2021년 발생한 여성살해만 100건이 넘었다. 11월19일에는 1만 명 넘는 시위대가 프랑스 전역에서 페미사이드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무엇보다 3억6천만유로(약 5천억원)에 그친 여성폭력 예방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성재단 발표에 따르면 현재 여성폭력 피해자의 40%만이 보호시설에 들어갈 수 있고 12%만이 법적·심리적 지원을 받고 있다.

독일 여성살해 사건을 접할 때면 독일 사례인지 한국 사례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프랑스, 브라질, 터키 등에서 벌어지는 페미사이드도 마찬가지다. 여성살해는 세계적으로 그 양상이 닮았으며, 목소리를 내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증오는 국경을 넘는다.

독일에서는 ‘페미사이드’가 여전히 낯선 단어다. 대다수 독일 사람은 여성이 납치, 성폭행, 살해되는 것은 멕시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방범죄수사청에서 2015년부터 매년 ‘파트너 관계에서의 살인 및 폭력’ 통계를 내지만, 범죄 동기를 분석하진 않는다. 가족·형법 전문 변호사인 크리스티나 크렘은 북부독일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는 수년간 이어진 폭력의 결과”라며 “가해자는 직업, 출신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회계층에 있다”고 말했다.

여성살해 범죄가 ‘열정의 범죄’?

독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에 대한 가벼운 형량이 큰 문제다. 많은 여성살해 사건이 최대 징역 10년형인 ‘과실치사’로 마무리된다. 독일 법조계 전문가들은 형법 제211조 개정으로 여성살해를 형량이 가중되는 ‘증오범죄’에 포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 법은 ‘악의’ ‘잔혹함’ 등의 특징이 보이면 살인 혐의로 기소하는데, 이런 특징으로 기소되고 무기징역형을 받는 경우는 여성에게 더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이 잠들었을 때 독을 이용해 살해한 여성은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지만, 다툼 중에 여성을 죽인 남성은 ‘살해 의도는 없었다’는 가해자 진술에 따라 평균 5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베를린에 있는 아내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 ‘보라’(Bora)에서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있는 25살 여성의 모습. 연합뉴스 EPA

베를린에 있는 아내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 ‘보라’(Bora)에서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있는 25살 여성의 모습. 연합뉴스 EPA

시위에서 나눠주는 숫자의 의미

가해자에 대한 가벼운 형량만이 문제일까. 여성살해 범죄를 ‘열정의 범죄’ ‘가족 비극’으로 다루는 독일 언론 매체의 보도 행태는 한국과 다를 바 없다. 2020년 12월, 독일 언론 <루어 나흐리히텐>은 아버지가 가족을 살해한 사건을 두고 ‘가족 비극: 아버지가 부인과 딸을 죽이고 자살’이라고 보도했다. 매체에서 여성살해를 두고 가족이나 파트너 관계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보도하는 행태는, 페미사이드가 사적인 문제나 가족 문제로 인식되도록 한다.

독일 법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이스탄불 협약’의 성과를 지켜보고 있다. 이스탄불 협약은 여성폭력을 차별과 인권침해의 한 형태로 명시한 유럽 내의 첫 국제협약이다. 가입국은 협약에 따라 여성폭력을 방지하고 근절하는 데 필요한 법안과 실질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포괄적인 정책과 여러 제도를 조정해야 한다. 독일은 2018년 협약을 비준했다.

페미사이드 문제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독일 여성변호사협회는 이스탄불 협약에 따라 법안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협회는 페미사이드 범죄가 젠더 권력에 기반한 불평등의 결과라 보고 법정에서 여성살해 문제를 기존과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스탄불 협약 제46조는 범죄가 현재 또는 이전 파트너(아내·남편 포함)를 대상으로 벌어지면 가중처벌할 수 있도록 국가 형법 개정을 요구한다. 제12조를 비롯한 다른 조항에서도 헤어짐(별거·이혼 포함) 또는 헤어짐을 시도한 파트너와 부부 관계에서 발생한 모든 살인사건을 처벌을 강화해야 하는 고려 대상으로 간주한다.

법 개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나 협약 비준 이후 독일 정부는 2020년부터 4년간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주거 공간인 ‘여성의 집’과 전문 상담소 지원을 확대하는 조처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편성된 예산은 총 1억2천만유로(약 1555억원). 현재 독일에는 ‘여성의 집’ 353곳과 임시보호소 약 40곳이 있으며, 자녀를 포함해 여성 3만여 명이 전국의 시설에서 지원받고 있다. 더 많은 시설이 필요한 상황이다.

베를린에서는 2014년부터 매년 11월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집회가 크게 열린다. 30여 개 단체와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 국제 여성연대 네트워크에서 집회를 조직한다. 이 시위를 통해 여성들은 1960년 11월25일, 군부독재에 맞서 저항운동을 하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도미니카공화국 미라발 자매의 죽음을 추모한다. 그들의 죽음으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 만들어졌다.

독일에서 4년간 이 집회 현장에 참석하면서, 페미사이드와 관련해 활동하는 대표적인 두 단체를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독일 여성 그룹 ‘카이네 메어’(Keine mehr·더는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 매년 카이네 메어는 1부터 120~130까지 숫자가 하나씩 적힌 종이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캠페인을 벌인다. 종이를 받은 시민은 숫자 순서대로 나란히 서는데, 이 숫자는 그해 남성 파트너가 살해한 여성 피해자 수다. 이 캠페인 현장에 처음 갔을 때 100명 넘는 시민이 차례대로 숫자를 들고 서 있는 광경을 보면서 섬뜩했다. ‘이게 한국보다 성평등이 실현됐다고 알려진 독일의 현실이구나.’

카이네 메어에서 일하는 알렉스 비슈네프스키는 말했다. “세계적으로 여성폭력에 대항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아. 물론 독일 여성운동이 그간 성과를 거둔 점도 있지만, 이제 성평등이 실현됐다는 잘못된 인식이 강하게 퍼져 있지. 그게 독일의 문제야.” 그의 말대로 5년 가까이 독일에서 머물며 페미니즘 이슈를 취재하면서 놀란 것은 곳곳에 젠더 불평등 문제가 있음에도 독일 사회에서 이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점이었다.

카이네 메어, 니 우나 메노스

페미사이드에 맞서 투쟁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단체는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해 전세계 지부에서 활발히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페미사이드라는 단어 사용 확산과 여성살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건 맞지만, 이 이슈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려면 갈 길이 멀다는 입장이다. 니 우나 메노스 베를린 지부에서 활동하는 브라질 친구 말렝 자파타는 “독일에서 페미사이드는 다른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문제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2021년 11월25일, 독일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베를린 집회 영상 메시지를 받았다. 베를린 거리에 변함없이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는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카이네 메어)고,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니 우나 메노스)고. 2021년 한국에서도 우리는 너무 많은 여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외침은 이어질 것이다. 지금으로선 아득하기만 한, 여성폭력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채혜원 전 국제여성공간(International Women Space) 활동가·<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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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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