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는 5개월 동안 동거한 연인관계였다. 피해자가 이별을 요구하면서 가해자의 폭력이 시작됐다. 마구 때려 전치 4주의 상해를 가해 처벌받았고(2019년 7월) 피해자 집에 몰래 침입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같은 해 9월). 목을 조르고 걷어차는 등(같은 해 11·12월) 폭행의 빈도와 정도는 점차 심해졌다. “쟤랑 같이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불안에 떨던 피해자가 지인에게 연락한 2020년 5월의 그날, 가해자는 피해자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귀가한 피해자를 따라 들어가 흉기를 휘둘렀다.
전·현 부부나 연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IPV·Intimate Partner Violence)은 그 폭력이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특징이 있다. 헤어졌다고 해도 상대방이 주소나 전화번호, 직장명, 주변 인간관계 등 개인정보를 알고 있어 피해자가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한겨레21>이 2016년 1월~2021년 11월 친밀한 관계의 남성이 여성을 죽인 사건의 판결문(347건)을 살펴보니 3건 중 1건(36%·126건)꼴로 가해자의 과거 학대 전력이 확인됐다. 협박, 상해, 성폭력, 주거침입, 위치추적장치 설치까지, 마지막으로 저지른 여성살해(페미사이드)는 앞선 여러 폭력이 누적된 결과였다.
이러한 여성살해 범죄의 특수성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이해돼야 공권력의 조기 개입이 가능하고 죄에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다고 여성계와 법조계는 지적한다.
핵심은 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 흘러온 폭력의 서사다. 그에 따라 적용 혐의부터 달라진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거치면서 가해자의 상습성이 누수돼 단순 폭행이나 단순 상해 사건으로 법정에 도달하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된다. 피해자가 숨진 사건에서 살인 아닌 상해치사 혐의가 쉽게 적용되기도 한다. 살인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어야 하는데, 통상의 폭력이 반복되던 중 어쩌다 발생한 사망 사고로 보는 것이다. 살인죄 법정형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상해치사죄 법정형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그 차이가 크다.
법원에서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가 인정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의 외도를 의심하다 17차례 연락을 안 받았다는 이유로 흉기를 휘둘러 아내를 숨지게 한 사건(대전지법 2018고합○○○)에서 재판부는 가해자가 사건 발생 직후 119에 신고하거나 “(가해자가) 구속 수감돼 경찰 조사받을 때 (치료로 잠시 호전된) 피해자가 딸을 통해 속옷을 챙겨 보내준” 정황에 비춰 살인의 고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해자가) 계속해서 피해자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다 그 의도를 관철하지 못할 때 폭행이 심해지다가 살인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맥락을 간과하면 ‘이렇게 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를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양형 적절하지 않으면 법정형 높여도 소용없어사건이 법대 위에 올려졌을 때 여성계와 법조계는 특히 양형에 주목한다. 양형은 피고인의 형량을 결정하는 절차다. 판사는 법에 규정된 형벌(법정형)에서 양형기준에 따라 그 형을 가중하거나 감경할 수 있다(처단형). 그리고 그 밖의 양형기준을 종합해 최종적으로 선고를 내린다(선고형). 살인이나 성범죄, 폭력 등 44개 주요 범죄에서 각 범죄 특성에 맞는 양형기준이 시행되고 있다. 이 기준은 의무 아닌 권고 사항이지만,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면 판결문에 그 이유를 적게 돼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특수성을 제대로 판단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려면 양형 과정이 더욱 엄밀해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복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법정형은 지속적으로 높아져왔다. 그러나 양형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법정형을 아무리 높여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현재 양형기준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살인 범죄 양형기준의 경우 범행 동기에 따라 사건을 △참작 동기 △보통 동기 △비난 동기 △중대범죄 결합 △극단적 인명 경시 살인 등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인은 대부분 ‘보통 동기’로 분류된다. 실제 <한겨레21>이 분석한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인 사건(치사죄를 제외한 268건)을 분석해보니 87.3%(234건)가 ‘보통 동기 살인’으로 분류됐다. 참작 동기 살인(12건), 비난 동기 살인(6건), 중대범죄 결합(5건) 등이 뒤따랐다.
정상적인 판단력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지거나 장기간 간병에서 비롯된 살인이 ‘참작 동기 살인’으로, 폭행 사실을 고소하겠다고 하자 보복하기 위해 또는 세상에 대한 분풀이로 살인한 사건은 ‘비난 동기 살인’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보통 동기 살인’ 정의에는 애인의 이별 요구에 앙심을 품어 벌어지는 살인(원한관계에 기인한 살인)과 돈을 제대로 갚지 않아 벌어지는 살인(채권채무관계에서 비롯된 살인) 등 여러 동기의 살인이 혼재돼 그 특수성이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
2021년 11월8일 대법원 양형위원회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주최한 ‘젠더폭력 범죄와 양형’ 토론회에서는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발제에 나선 김정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말다툼, 몸싸움 등 시비 끝에 격분하여 살인한 경우는 다 같이 원한관계에 기인한 살인 항목에 묶여 있다. 실제로는 통상 남성들 사이에 술자리에서 말다툼이나 몸싸움이 일어나고 시비가 돼 살인에 이르는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교제살인의 특수성과는 너무나 다른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금전관계나 경제적 이익이 주된 동기가 된 살인을 교제살인과 같이 묶을 합리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라고도 말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낯선 사람이나 단순 아는 관계에서의 범죄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으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의 특성을 포착할 수 없다. 한 사람만 지속적으로 괴롭혔더라도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이며,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보통 동기가 아니라) 비난 동기 살인으로 포섭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양형인자를 신설하거나 기존 양형인자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다.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를 양형 가중요소로 고려하는 것이 한 예다. 장애인이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 고려되는데, 장기간 폭력에 노출됐거나 신뢰관계가 역이용될 수 있는 피해자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개념에 포섭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범죄 양형인자인 ‘인적 신뢰관계 이용’을 끌어와 활용하는 대안도 제시된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젠더폭력과 관련한 특별법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면밀히 파악하는 것만으로 양형에서 그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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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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