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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인지도 모르는 젠더 범죄통계, 바로잡는다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여성폭력 통계 개선 방안 논의 중”
이르면 2023년부터 범죄통계에 가해자-피해자 관계 세분화해 표기
등록 2021-12-28 08:05 수정 2022-12-09 07:07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은 젠더폭력의 정확한 통계가 마련되는 것이 여성 피해자를 지원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정책 마련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은 젠더폭력의 정확한 통계가 마련되는 것이 여성 피해자를 지원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정책 마련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이르면 2023년부터 수사기관이 범죄통계를 집계할 때 아내에 대한 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전/현 배우자’로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된다. 가해자-피해자 관계를 14개 범주로 분류한 현행 범죄통계엔 ‘동거친족’과 ‘애인’ 항목은 있지만 배우자 항목이 세분화돼 있지 않아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 피해 실태를 제대로 집계할 수 없었다.

범주 모호하면 ‘기타’, 젠더폭력 집계 안 돼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은 2021년 12월8일 <한겨레21>과 만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가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과 연동된 범죄통계시스템 고도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여성 대상 폭력 통계를 개선하는 방안을 포함했다. 통계로 여성 피해자 규모가 정확히 잡히면 앞으로 여성 대상 범죄와 관련해 초동 대응 전략 등이 더 세심하게 수립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킥스는 검찰과 경찰, 법원과 법무부가 수사, 기소, 재판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 정보와 문서를 입력하는 통합시스템으로, 이곳에 입력된 범죄통계원표 자료를 토대로 범죄통계가 산출된다. 

현재 국내 형사사법기관의 공식 통계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범죄통계원표’에 기반하고 있다. 디지털성범죄 같은 신종 범죄 발생 실태에 대한 통계를 산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범죄 피해자 규모 파악과 지원 프로그램 마련 등을 위해 필요한 피해자 정보를 제대로 입력하기도 어렵다.

특히 범죄 특성과 동기를 살필 때 필수적인 가해자-피해자 관계 범주가 ‘국가, 공무원, 고용자, 피고용자, 직장동료, 친구, 애인, 동거친족, 기타친족, 거래상대방, 이웃, 지인, 타인, 기타’ 등 14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항목 자체가 세분화돼 있지 않다보니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기타’ 항목에 표기하는 일이 빈번한다는 지적도 나온다.(1) 예를 들어 동거 중인 배우자에 의한 살인사건의 경우 법률혼 배우자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수사기관 실무자가 동거친족이나 애인 등의 범주에 넣기 모호하다고 판단하면 ‘기타’ 관계로 표기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관행이 반복되면 전체 ‘젠더폭력’ 피해 규모 자체가 과소 추정된다.

국수본이 진행하는 2022년 범죄통계 고도화 사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젠더폭력과 관련한 개선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가해자-피해자 관계를 세분화하는 것이다. 계획안엔 ‘전/현 배우자, 전/현 애인, 양부모, 친부모, 계부모, 조부모, 자녀, 손자녀, 의붓자녀, 4촌 이내 친척, 형제’ 등으로 구체화하는 방안이 담겼다. 조 기획관은 “‘사실혼 관계’도 포함해달라고 (국수본에) 요구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행 방법대로라면 2021년 11월 서울 서초구에서 30대 남성이 동거 중이던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흉기로 찌른 뒤 아파트 고층에서 떨어뜨려 살해한 사건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하게 기록이 어렵기 때문에 단지 ‘변사체’ 관련 살인사건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통계가 개선되면 이 사건이 동거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기록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행대로면 ‘변사체’, 개선되면 ‘동거관계 발생’ 사건

사건 피해자가 여러 명인 경우 범죄통계원표에 전체 피해자의 인원과 성별 정보를 입력하는 것도 개선 방안에 포함됐다. 그동안엔 ‘대표 피해자’ 한 명의 정보만 입력할 수 있어 아내와 자녀 등 피해자가 여럿 발생해도 모두 기록할 수 없었다.

살인사건의 범죄 원인을 구체화해 기록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교제폭력, 성매매, 스토킹’ 등 여성이 겪는 다양한 범죄 피해가 어떻게 살인으로 이어지는지 드러내기 위해서다. 조 기획관은 “현재 사용하는 범죄통계원표는 사건 발생 뒤 (검거하는) 피의자 중심이다. 살해당하는 여성 피해자의 피해 실태와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어, 구체적인 범죄 원인을 별도로 입력할 수 있게 시스템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집계된 적 없는 젠더폭력 범죄의 규모와 여성 피해자 수가 드러나게 된다. 조 기획관은 “2021년 (남녀 모두 합쳐) 타살로 분류된 사건이 369건이다. 이 중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인사건 피해자를 따로 집계했더니 100여 명이다. 가정폭력에 스토킹, 교제폭력 등을 합친 피해자 통계를 내보면 (여성 피해자 비중이 높은)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한다”고 말했다.

개선사항을 반영한 범죄통계는 2022년 작업을 완료해 이르면 2023년부터 현장에 반영된다. 조 기획관은 “성폭력, 가정폭력, 교제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 사건 등 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서 담당하는 사건의 경우 사후 모니터링과 피해자 보호 조치까지 해야 한다”며 “​정확한 집계에 기반한 통계가 나오면 관련 정책 수립뿐 아니라 담당 인력과 예산을 조정하고 배분할 때도 중요한 논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참고 문헌
1. ‘젠더폭력 통계 구축 방안을 위한 해외 사례 비교 연구’,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 등 9명,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정책연구개발 용역과제, 2019

상세·공개할수록 예방된다

미국·캐나다 젠더폭력 범죄통계

2019년 12월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여성가족부 장관이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에서 제공받은 통계를 토대로 여성폭력 발생 현황 등을 정기 공표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현재 경찰청이 매년 8월 공개하는 범죄통계원표 작성 방법이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경찰 범죄통계는 살인범죄에 치사범죄(상해치사·폭행치사 등)가 포함되지 않고, 성범죄 역시 강간·강제추행죄만 포함된다. 피해자-가해자의 관계나 살인사건의 원인이 제대로 기입되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젠더폭력 규모를 실제보다 적게 추산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이 반복돼 이혼한 사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경우, 범행동기가 가정폭력으로 기입되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역시 친족이 아닌 타인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국외에선 한국보다 훨씬 상세한 범죄통계시스템을 운용하며 젠더폭력 통계를 수집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국가 사건-기반 보고 시스템’(NIBRS)은 한 사건에서 발생한 모든 위법행위를 기록한다. 여성을 납치한 뒤 강간·살해한 범죄가 발생하면 △납치 △강간 △살해 3건의 범죄 발생을 기록하는 것이다. 또 피해자 유형, 연령, 성별, 인종 등은 물론이고 ‘정당방위적 살인 정황’ 등의 정보까지 기록한다. 캐나다 연방 통계청은 피해자-가해자의 관계를 전/현 배우자, 전/현 혼인관계, 전/현 내연관계, 전/현 교제관계, 전/현 불륜관계 등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혼인관계에 사실혼을 포함한다. 한국과 유사한 형사사법체계를 따르는 일본도 경찰 통계를 집계할 때, ‘배우자’ 관계에 있는 폭력 피해자 중 여성인 경우를 따로 표시해 여성 피해자 규모를 파악하고, 경찰청 누리집에 스토커·배우자 폭력 등에 관한 통계, 인신매매 통계, 풍속관계사범 통계 등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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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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