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죽고 나 죽는 수밖에 없다.” 2016년 8월 전남 고흥군의 한 남성은 교제하던 여성이 연락을 피하자 그를 찾아가 이렇게 협박하고 살해했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2018년 1월 교제 중이던 여성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전북 익산시의 한 남성도 이렇게 말하며 전 여자친구를 모텔에 가둔 채 협박하다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자. 너랑 나랑 깨끗하게 가자.”
2020년 6월 서울 도봉구에서도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을 들은 남성이 교제하던 여성을 협박하다 살해했다.
<한겨레21>이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이용해 확보한 427건의 ‘페미사이드’(남성의 여성살해) 사건 판결문 중 일부다. ‘함께 죽자’. 배우자·교제 등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해 사건 기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협박이다. 폭력 피해를 겪고 살아남은 여성 생존자들도 비슷한 기억을 공유한다. 피해자를 소유·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온 남성 가해자의 사고체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말이다. 친밀한 관계의 페미사이드 사건에선 그 극단적 지배욕의 일단을 다른 이들이 대개 판결문 등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함께 죽자’, 실제 여기에 이르는 사건들도 있다.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경우다. 국외에선 ‘아이에프에스’(IFS·Intimate Femicide Suicide·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살해 후 자살)란 범주로 활발히 연구될 정도로 유형화된 범죄다. 이런 사건은 재판에 넘겨야 할 피의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수사가 종결된다. 범죄통계에서도 누락된 채 둘만의 ‘안타까운 비극’으로 남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범죄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유형으로 살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기록되지 않은 범죄를 확인하기 위해 <한겨레21>은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언론보도(통신사 포함)에서 ‘연인, 여자친구, 여성, 교제, 아내, 부부, 살해, 자살, 극단적 선택, 시신, 유기, 경찰’ 등의 단어를 조합해 기사를 검색(자살미수 사건 제외)했다. 그 결과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만 73건이었는데 그중 75%는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졌다. ‘배우자 살해 후 자살’ 사건이 42건(57.5%)을 차지했고 13건의 교제관계(17.8%), 8건의 직장동료·이웃 등 타인 관계(10.9%)에서의 살해 후 자살 사건이 뒤를 이었다. 10건(13.8%)은 초동수사 단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
기사에 나이가 드러난 가해자들의 연령대를 보면 40대가 19명으로 가장 많았고 50대(18명), 60대(15명), 70대 이상(10명), 30대(9명) 차례였다. 눈에 띄는 부분은 70대와 80대는 물론 90대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에서도 ‘부부싸움’ ‘불화’ ‘남편의 의처증’ 등이 사건 정황으로 꼽힌 점이다. 70대 이상 가해자의 범죄 보도 10건 가운데 1건만 ‘배우자의 치매’가 이유로 명시됐다. 여성살해 후 자살 사건을 살핀 국외 연구자들이 ‘55살 이하의 가해자는 주로 병리학적 소유욕과 질투 때문에 배우자를 살해하고 55살 이상 범죄자는 중증의 아픈 배우자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자비살인(간병살인)이 일어난다’1고 분석하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런 결과는 여성살해 후 자살 사건 가해자의 전형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이런 사건의 가해 남성들에게서 ‘맨박스’(Man Box·가부장제 아래서 나타나는 강요된 남성성)에 갇힌 유형이 많이 보인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라고 설명했다. “가해자들은 ‘남자다움’에 대한 오해에 빠져 해로운 남성성, 공격적인 남성성을 지향하는데 스스로가 꿈꾸는 남성성과 현실의 간극이 크기 때문에 그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여성에게 모든 공격을 쏟아부은 뒤 스스로도 해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성살해 후 자살 사건이 ‘치정극’이나 ‘가정불화의 극단적 결말’이 아니라 가부장제 아래서 발현된 뒤틀린 남성성의 결과라는 뜻이다. 봉건적 질서가 혼재된 한국 사회에서 80~90대 노인까지 여성살해 범죄 가해자가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살해 후 자살 사건은 빈번히 발생하진 않지만 가족과 사회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 배우자 살해 과정에서 자녀까지 살해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한겨레21>이 검토한 73건 가운데 7건에서 자녀가 엄마와 함께 살해됐다. 범죄심리학자인 이미정 박사는 “이런 사건이 절망스러운 것은 발생 원인을 당사자들 간의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전가시킴으로써 국가는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며 “(이로 인해) 사회적 방관 또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2고 짚었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중앙자살예방센터 등의 기관이 만들어졌듯 페미사이드 범죄의 원인과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기구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1990년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전역에 82곳의 ‘가정폭력 사망 검토위원회’를 마련해 배우자 살해 사건을 검토·분석하고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피해자 지원 서비스기관, 아동복지 시설, 경찰, 건강관리(의사), 사법기관, 교정·사회학 전문가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기구다. 캐나다 역시 가정폭력 사망 검토위원회를 두고 가족폭력과 관련 있는 여러 기관이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살펴보고 개선 방안을 마련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가해자가 사망해 공소제기를 할 수 없어도 가능한 만큼 수사해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범죄 영역은 개인정보 문제로 연구자나 시민사회의 접근이 어려운 만큼 국가 차원의 통합된 전담기구를 만들어 데이터를 집적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김민지 인턴
참고 문헌
1. ‘살인범죄의 실태와 유형별 특성: 가족살인범죄를 중심으로’, 홍영오 등, 2019
2. ‘젠더폭력에 대한 경찰의 대응방안: 친밀한 관계의 여성 살해 후 자살을 중심으로’, 이미정, 2018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여성폭력으로 긴급한 구조·보호 또는 상담이 필요한 경우 여성긴급전화 ☎️1366 에 전화하면 365일 24시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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