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21일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문화공연 프로젝트 ‘마음대로, 점프!’를 통해 아내폭력 피해 생존자인 세 사람을 만났다. 활동명 ‘임작가’(임연경), ‘행복’(가명 김수연), ‘선화’(가명 이선화). 각각 30대, 40대, 50대인 세 사람은 짧게는 4년, 길게는 20년 넘게 배우자로부터 폭력을 겪었다. 지금은 죽음의 위협에서 살아남아 배우자와 결별하고 어렵사리 자립과 치유의 여정을 걷고 있다. 아직 배우자로부터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두 사람의 경우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은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윤색했다. _편집자
죽음은 늘 임연경씨의 주위를 맴돌았다.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이지만 고단한 생계를 꾸려오면서도 죽음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스물다섯에 만난 남편과의 결혼생활 4년째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자주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의 방식을 검색하곤 했다. ‘나만 죽으면 되나. 죽을 것 같다. 죽어야겠다….’
예의 바른 또래 청년처럼 보였던 전남편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매일 연경씨를 학대했다. 언어폭력은 “난 널 죽이진 않는다”는 말로 시작해 연경씨를 고문하는 말들로 이어졌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은 낮에 홀로 아이들을 돌보는 연경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아이를 조산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거리에서 폭행당할 때 행인에게 ‘제발 신고해달라’고 호소한 적도 있지만 그는 못 본 체 가던 길을 갔다. “내가 더 잘해볼게, 했어요. ‘너도 나도 상처가 많지만 그래도 아빤데 그렇게 하면 되겠니, 우리 그러지 말자’고 설득도 해보고요.”
10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한 수연씨, 20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한 선화씨는 더 오래 그 끔찍한 고통을 견뎠다. 수연씨는 “12년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돌아봤다. 가해자는 폭행, 성적인 학대, 금전적 학대, 관계의 고립까지 폭력적인 배우자가 보여줄 수 있는 악행을 모두 일삼았다. 선화씨의 전남편은 의심과 집착이 심각했다. 선화씨의 하루 동선을 하나하나 쪼개 해명을 요구했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 일상적인 행동을 모두 통제했다. 결혼 뒤 한 달도 안 돼 공포가 시작됐다. “나를 벗어나면 그날로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 늘 흉기를 품고 다니는 가해자는 그렇게 선화씨를 협박했다. “저도 저지만 애를 괴롭히는 일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저는 항상 무릎 꿇고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죽음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겪는 동안 생존자들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남편에게 맞고 산다’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대화 소재가 아니다. 가해자로부터 떠나기까지 자녀에게도 차마 피해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생존자들은 말한다. “가족도 그런 부분에선 기댈 수가 없어요. ‘남편이 도대체 왜 그러냐’고 할 때 ‘의처증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면 ‘가해자가 미쳤다’고 하기보단 ‘뭔가 빌미를 준 게 아니냐’는 식이니까요. 세상에 내 편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아이에게 아빠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요.” 선화씨의 설명이다.
연경씨의 경험도 비슷하다. 가해자는 목소리를 낮춰 연경씨에게 언어폭력을 휘둘렀고 연경씨가 소리를 지르며 맞서면 그 소리만 새어나가 동네에 울려퍼졌다. 이웃들은 “저 여자 이상한 여자다, 저 집 신랑 어떡하냐”고 수군거렸다. 연경씨가 처음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연락했을 때 아버지는 “부부간에 참고 살아야 한다”고 딸을 나무랐다. 가해자의 폭력을 처음 지역 시민단체에 호소했을 때 수연씨는 “가끔 때리는 건 폭력이 아니니 남편에게 적당히 잘해주시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누군가 저에게 그건 폭력이니 집에서 나오라고 했더라면, 제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나에게만 가해자였다”매일이 고문인 삶인데 성인인 아내폭력 피해자들은 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까. ‘비경험자’들은 쉽게 반문한다. 그러나 폭력은 피해자를 심리적·인지적·관계적인 면에서 무력하게 만든다. 공포에 압도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평소보다 저하되고 오랜 정서적 학대로 자존감이 떨어져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매일 정신적 학대를 당하면 정신이 먼저 망가지는 것 같아요. 학대당하는 순간 저항하기보단 ‘나 자신이 정말 하찮다’는 생각에 빠지게 돼요.” 선화씨의 회고다.
“저는 저에게만 가해자였어요.” 연경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엔 그냥 방실방실 웃기만 했어요. 시부모님이 저를 통제하는 모습 앞에서도, ‘내가 가족 없이 자라서 그런가봐, 가족은 원래 이런가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경찰에 신고할 때조차 걔를 잠깐 진정시키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가정폭력이 나와 관련된 단어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내폭력을 겪기에 앞서 친족성폭력이라는 또 다른 학대를 경험했던 수연씨는 폭력적인 배우자 앞에 무력했던 자신을 아직도 책망하고 있다. “저는 제 존재 자체에 대해서 부인하듯이 그 인간이 내 옆에 있는 것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에, 그게 폭력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어요.”
폭력 앞에 있을 때도, 벗어난 지금도 생존자들에게 아이들은 멍에이자 방아쇠다. 아이 때문에 견디고, 아이 때문에 떠난다. 선화씨는 “몇 번이나 벗어나려 했다”고 했다. “뒷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요. 언제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숨어 살아야 할 텐데, 나는 숨어서 산다 해도 아이는 어쩌지? 아이들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먹고살지? 애가 있으니까 애를 중심으로 계산하게 되지요.” 그는 결국 성인이 된 자녀의 설득으로 현금 5만원을 들고 가해자에게서 달아났다. “‘엄마, 벗어나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어’라고 아이가 말해줬어요. 우리 아이가 저에게는 구원자였어요.”
4년을 견딘 연경씨가 느낀 강력한 위기도 아이에게서 왔다. “아이들 앞에서는 밝은 모습 보이는 거, 이게 첫 번째였어요. 남편이 아이를 흔들고 소리를 질러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모습을 볼 때, 이건 정말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즈음엔 저도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거든요.” 처음 이런 고통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던 날, “그거 되게 심각한 폭력이야”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연경씨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길로 집으로부터 달아나 4년 동안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회로부터 증발했다.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는 불면의 날에 수연씨는 거듭 자책한다. “막내가 세 살 때 제가 집을 나왔어요. 저는 폭력으로부터 피하지도, 아이들을 보호하지도 못했어요. 아이들에게 분노를 노출했던 죄책감이 지금도 너무 커요.”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생존자들은 배우자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쫓긴다. 제때 쉼터를 찾아 필요한 지원을 받는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그’가 찾아올 거라는 공포가 생존자들을 몰아세우고, 돈 한 푼 없이 거리로 나온 현실이 이들을 추격한다.
연경씨는 고속도로 휴게소, 골프장, 지방의 온천호텔을 전전하며 자신을 숨겼다. 4년. 신분을 드러내지 않아도 숙식을 제공받고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일들만 찾아다녔다. 본인 명의 휴대전화를 해지하고 가족·친구와도 연락을 끊었다. 배고프면 물로 배를 채웠다. 그 기간 일터에서 연경씨를 마주친 사람들은 “술에 취했거나 넋이 나간 사람 같다”고 했다. 혼자 있으면 자해했다. “갓길에 깜빡이 켠 차만 봐도 미친 사람처럼 덜덜 떨고 혼잣말하고 그랬어요. 그 사람이 찾아왔을 것 같아서요. 제가 만든 괴물이 점점 더 커졌어요.”
다시 ‘내가 죽어야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연경씨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다.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쉼터에서 지내는 동안 가해자와의 이혼 절차도 마무리했다. 연경씨가 바랐던 방식은 아니었다. “떠도는 시간 동안 (이혼 법정이) 걔를 심판할 날이라고 상상했는데 국선변호인은 ‘연경씨가 애를 안 봤다고 소송 걸 수도 있으니 가정폭력이란 말을 절대 쓰지 말고 상대방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요. 무력감을 크게 느꼈어요.”
수연씨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상처로 약해질 대로 약해져 회복이 더디다. 처음 폭력 피해자 쉼터에 입소한 게 10년 전이지만 그는 “아직도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저는 변화 속도가 제일 더딘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요. 50년을 사는 동안 집은 늘 끔찍한 공간이었거든요. 쉼터에 있을 땐 괜찮았지만 이렇게 혼자 지내면 다시 공포와 불안이 올라와요. 똑똑한 선택을 하지 못한 저의 무지, 거기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선화씨는 1년여간의 쉼터 생활 이후에도 아직 가해자와 마주칠 수 없어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간다. 뉴스에서 ‘이혼 중인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보도를 보면 온종일 불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 게 행복의 시작”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끝까지 냉정하게 조심해야겠지요. 하지만 내가 가해자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 걸음도 못 딛는다면 얼마나 손해인가 생각해요. 조심하되, 허상에 사로잡히고 싶지는 않아요.”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말조차 낯설었다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 ‘생존자’라고 힘주어 말한다. “저 생존자 맞아요. 죽음 속에 있었고, 죽어가고 있었고, 죽음 없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뚫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 ‘오리지널 생존자’예요. 지금 이 순간에 폭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들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죽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기회가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선화씨)
가장 친밀한 가해자로부터 살아남은 세 사람은 우리 사회가 좀더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는 연경씨는 말했다. “사실 모든 폭력의 뿌리는 가정폭력 아닐까요? 그런데 가족 안에서 일어난 폭력에 대한 이해가 무척 낮은 것 같아요. 저도 그랬지만, 1366(여성긴급전화) 같은 도움 줄 곳이 멀게 느껴지잖아요. 이런 일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걸 제 방식으로 알리려 해요. 쉼터에 가야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이 내 삶 속에서 언제든 폭력을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umkija@hani.co.kr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뒤에도 경우에 따라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을 겪는다.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에 착안해 한국여성의전화는 전국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와 연계해 ‘생존자가 한 사람으로서 치유를 통해 삶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2019년부터 3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로 ‘점프’ 사업을 진행해왔다. 노래 만들기, 춤 등의 워크숍을 통해 피해자들이 상처받은 감정과 자아를 드러내고 치유할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2021년 11~12월 울산, 전주, 대구, 강릉을 거쳐 서울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프로젝트의 대단원을 마무리했다.
3년 내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연씨는 “10년 동안 폭력 피해로부터 벗어나려 공부도 하고 상담도 했지만 ‘점프’에서의 3년만큼 나를 변화시킨 것은 없다”고 했다. 자유롭게 무대에서 춤출 때, 그의 몸이 40여 년 동안 품고 있던 긴장, ‘누군가 나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긴장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점프’에서 만난 다른 생존자들과 대화하면 의지가 많이 됐고 성장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들고요. 저는 ‘점프’가 계속 이어져야 생존자들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여성폭력으로 긴급한 구조·보호 또는 상담이 필요한 경우 여성긴급전화 ☎️1366 에 전화하면 365일 24시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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