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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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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난 두 소녀, 살릴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

성폭행당한 뒤 동반자살한 청주의 두 여중생, 그들을 살릴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
등록 2021-12-26 14:33 수정 2022-01-21 02:35
인도에선 2020년 2만2372명의 기혼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영국 방송 <비비시>(BBC)가 최근 보도했다. 하루 평균 61명, 25분마다 1명이다. 이 보도에서 인도의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한국 사회라고 다를까. 중앙심리부검센터가 2020년 발표한 ‘자살 사망자’ 566명의 심리부검 결과를 보면, 40~50대 여성은 가족 관련 스트레스가 극단적 선택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언론보도를 검색해도 ‘가정불화로 극단적 선택을 한 주부’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정불화’라고 썼지만 ‘가정폭력’이라고 읽힌다.
드러난 범죄만 놓고 봐도 한 해 3만여 명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다. 90% 이상은 여성이 피해자다. 성폭력 피해자의 높은 ‘자살 생각’과 ‘자살 시도율’은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제 절망하나. 존재가 훼손됐을 때, 더 나은 인생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절망한다. 성폭력과 아내폭력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페미사이드(남성의 여성살해) 사건들을 심층취재하고 있는 <한겨레21> 제1394호에선 자살이라는 이름 뒤에 은폐된 범죄를 살폈다. 성폭행 피해를 호소한 뒤 세상을 떠난 중학생들, 배우자의 가스라이팅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의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죄, 사실상 ‘암수살인’이다.
여성을 살해한 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남성들의 사례도 언론보도 검색을 통해 수집·분석했다. 가장 파괴적인 범죄이지만 이 또한 범죄통계에 기록조차 되지 않는다. 이 죽음들을 ‘범죄’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 한, 성평등한 사회의 약속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_편집자주
2021년 12월10일 청주에 있는 미소(가명)의 집. 세상을 떠난 미소가 평소 좋아하던 인형, 초코과자, 콜라 등이 책상에 정돈돼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2021년 12월10일 청주에 있는 미소(가명)의 집. 세상을 떠난 미소가 평소 좋아하던 인형, 초코과자, 콜라 등이 책상에 정돈돼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단지의 화단. 가지가 부러진 나무 아래 두 소녀의 주검이 발견됐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소녀, 아름이와 미소(가명)는 군것질을 좋아하는 14살이었다. ‘넌 죽지 말아. 살아서 행복해져. 그게 좋을 거 같아.’(아름) ‘너가 내 옆을 먼저 떠나면 나 되게 아플 거 같아.’(미소) 죽음을 선택한 그날 이전부터 둘은 메신저를 통해 여러 말을 주고받았다. 위로보다 좌절의 말이 많았다. 그리고 2021년 5월12일 오후 5시, 두 소녀는 함께 세상을 등졌다. 미소는 그해 2월 초, 아름이는 2월 말에 아름이의 의붓아버지 ㅇ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했지만, 영장이 두 차례 반려된 뒤였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건이 이어졌다. 2021년 3월8일 10년간 친아버지로부터 성폭행당한 여성이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임시거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월31일 상관으로부터 성추행당한 공군 부사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월31일 인천에서도 4년 전 상사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은 여성 공무원이 자택에서 숨졌다.

성폭력 범죄로 인한 자살은 좀처럼 신고되지 않아 그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신고돼도 수사 과정에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범죄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죽음은 국가통계로 집계되지 않는다. 이런 범죄를 ‘암수범죄’라고 부른다. 자살 원인이 스트레스나 우울증으로 둔갑되기도 한다. 5월에 공군 부사관의 자살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자, 군은 이 사건을 ‘스트레스성 자살’로 밝혔다가 논란이 일자 정정한 바 있다. 성폭력을 겪은 여성들의 자살은, 사회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타살, 즉 페미사이드(여성살해)에 해당한다. 두 소녀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ㅇ의 1심 판결문(청주지법 2021고합○○○), 유가족 인터뷰 등을 통해 왜 이들의 자살이 페미사이드인지를 추적해봤다.

‘마음 아파.’ 5월12일 새벽 1시44분, 미소가 아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소는 부모님에게 드릴 편지를 쓰고 있었다. 편지는 유서였다. ‘나 너무 아팠어. (중략) 1월에 있었던 안 좋은 일 꼭 좋게 해결됐으면 좋겠다. 나쁜 사람은 벌 받아야 하잖아. 그치? (중략) 엄마가 나한테 하던 잔소리도 이제 못 듣고 아빠가 아침에 깨워주는 목소리도 못 듣는 거네. 너무 슬프다. 사랑해요.’

충북 청주에서 친구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뒤 2021년 5월12일 세상을 떠난 중학생 미소(가명)의 유서. 미소의 부모는 100일 추모제가 열린 다음날 딸의 방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유서를 발견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충북 청주에서 친구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뒤 2021년 5월12일 세상을 떠난 중학생 미소(가명)의 유서. 미소의 부모는 100일 추모제가 열린 다음날 딸의 방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유서를 발견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성폭력 피해 여성 1.7% “수사기관 도움받아”

사건은 1월16일 저녁 일어났다. 미소는 아름이 집에 놀러갔다. 아름이 의붓아버지 ㅇ이 밤에 갑자기 들어왔다. 미소는 다음날 새벽 다른 친구에게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메신저로 알렸다. 가해자는 ㅇ이었다. 미소는 그로부터 10여 일 지난 2월1일 부모님 손에 이끌려 경찰을 찾아 ㅇ을 신고했다. 사흘 뒤 해바라기센터에 가서는 ‘아름이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2월26일 아름이는 미소가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상담받고 여섯 살, 열세 살 때 ㅇ이 자신한테 저지른 성폭력을 털어놨다. 엄마에게도 7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다음날 아름이 사건도 경찰에 신고됐다.

어렵게 성폭력 사실을 신고했지만, 3개월 가까이 지나도 ㅇ이 구속되지 않자 미소와 아름이는 좌절했다. ‘증거가 없어서… 하.’ 미소가 4월22일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름이는 5월12일 다른 곳에 사는 언니에게 울며 전화했다. “성폭행 비슷한 걸로 재판 같은 걸 받았는데 그게 잘 안됐어. 짜증나.”

그래도 둘은 한때 살고자 했다. 미소는 학교를 전학 가서 영어동아리에 들어가고, 부반장 선거에도 나섰다. 아름이도 ‘다음주부터 학교도 나갈 생각이고, 지금 내 인생을 바꾸려고 노력 중’이라는 메시지를 5월10일 친구에게 보냈다. 아름이는 집에서 유화를 그렸다.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2019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를 보면, 성폭력 피해 여성(2805명) 가운데 1.7%만 “수사기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답했다. 범죄통계원표에 검찰이 등록하는 성폭력 사건은 매년 평균 3만 건 안팎이다. 피해자 넷 중 하나는 20살 이하 여성이다. 2019년 발생한 성폭력 범죄(3만2029건)의 피해자 24.4%는 20살 이하 여성이었다. 피해자의 절반 이상인 58.4%가 30살 이하 여성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피해자의 상처는 더 깊다. 성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연구를 종합한 결과를 보면, 성폭력 피해 여성의 5∼80%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장애,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1 아동성폭력 연구자들은 ‘아동이 아는 사람에게 성적 폭력을 당하면, 인간에 대한 기본적 믿음과 신뢰가 와해되고, 안정감이 붕괴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는다’고 지적한다.2 성폭력을 겪은 아동은 피해 경험이 없는 아동보다 자살 위험이 높은 ‘자살사고형’에 속할 확률이 23.24배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3

선생님·공무원·경찰관이 참석한 상담

둘에게도 상흔이 남았다. 미소는 정신과 진찰을 받으러 다녔고, 아름이는 조울증을 진단받았다. 아름이는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면 무서워서 이불을 꾸리고 자곤 했다. “난 우울하면 몸으로 나타난대.” 아름이가 5월10일 친구에게 밝힌 몸의 증상은 5개였다. 우울증, 불면증, 불안장애, 자해 그리고 자살 생각. 아름이는 피해 사실을 말해야 할 즈음 자해도 했다. 2월27일, 2월28일, 3월10일. 아름이가 상처를 치료받으러 병원에 간 날들이다.

“두 아이가 사회에 대한 절망을 한 거지, 절망. 도와주는 사람은 없구나. 미소의 사건이라도 일부 영장청구를 해서 ㅇ이 구속됐다면 두 아이는 살 수 있었어요. 영장이 뭉개진 거예요. 두 사건 가운데 무엇을 보강해야 하는 수사인지 (피해자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어요.” 미소의 아버지가 말했다. 미소 가족에게 법률지원을 해온 김석민 충북법무사협회 회장도 “아이들을 살릴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적어도 세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살릴 수 있었던 기회. 2021년 3월11일 오전 11시 아름이가 다니던 중학교 상담실. 아름이는 전날 자해하고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이날 출석했다. 상담에는 학교 상담선생님, 청주시청의 아동복지 담당공무원, 경찰관이 참석했다. 경찰은 피해자 조사를 했어야 하는데 아름이와 연락이 닿지 않아서 학교로 찾아온 참이었다. 그 자리에서 아름이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니요.” 이어서 이들은 2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술한 내용을 물었다. “이야기는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경찰관이 설명해주면 제가 답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기억나는 내용이 있는지, 다시 질문이 나왔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아름이는 참고인 조사가 끝나갈 때 “아버지와 분리되기 원하냐”는 질문도 받았다. “아니요.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아름이는 그 뒤로도 종종 말을 바꿨다.

성폭력 피해자 미소(가명)의 부모와 이들에게 법률 지원을 해온 김석민 충북법무사협회 회장(왼쪽)이 성폭력 가해자 ㅇ의 1심 선고가 내려진 12월10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성폭력 피해자 미소(가명)의 부모와 이들에게 법률 지원을 해온 김석민 충북법무사협회 회장(왼쪽)이 성폭력 가해자 ㅇ의 1심 선고가 내려진 12월10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아름이에게 범행 장소를 찍으라고 전화 건 가해자

“아름이 같은 친족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와 분리할 거냐고 묻는 일은 무책임하다. 수사가 강제로 시작된 이상 국가는 가해자와의 분리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미소네 가족을 도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온 김석민 법무사의 지적이다.

성폭력처벌법 제29조 2항을 보면 ‘수사기관은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조사할 때 피해자가 편안한 상태에서 진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하며, 조사 횟수는 필요한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수사기관의 권위적인 태도, 반복적인 질문 탓에 다시 2차 피해를 입기도 한다. 관련 연구를 보면 △장기간 수사로 인한 부정적 영향 △장시간 조사와 반복 질문 △피해 진술 기회 부족, 사건처리 미통지 등을 피해자들이 2차 피해로 꼽는다.4 청주청원경찰서 관계자는 “(재차 성폭력 피해 사실을 질문한 이유는 진술을) 한 번에 끝내기 위해 그런 것이지 2차 피해라든가 불필요한 것을 물어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름이는 3월16일 밤 9시20분에는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던 ㅇ을 대신해 범행 장소인 자신의 방을 사진 찍어 보내는 일까지 해야 했다. 청주청원경찰서 담당경찰은 수사보고서에 ‘피의자 변호사의 권유로 피해자가 현장사진을 촬영해 문자로 전송하게 했다’고 썼다. 2차 피해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경찰서 관계자는 “피의자 ㅇ이 일방적으로 피해자에게 전화했다. 빠른 수사를 위해 협조받았던 것뿐이지 2차 피해를 가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3월18일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은 다음날 보완수사를 이유로 반려됐다. 아름이는 왜 ‘꿈인 것 같다’고 말했을까. 아름이가 처음 성폭력 사실을 털어놨던 정신건강의학과를 3월20일 다시 찾아가 받은 진료기록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그랬다… 정신과에서 얘기한 것들을 조사받았다. 모두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니라고 얘기하니까 좋았다. 마음이 편했다. 아니라고 믿기로 했어요.’ 아름이가 털어놓은 진실이었다. 이날 진료기록에 의사는 ‘​보호자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친어머니가 끊어버린 진술

살릴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 4월28일 오후 4시6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료·법률 지원을 하는 해바라기센터의 진술 녹화실. 아름이는 친어머니, 국선변호인과 함께 경찰관 앞에 앉았다. 실제 진술에 앞서 진술 연습이 진행됐다. 학교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와 달리 아름이가 헤헤 웃었다. 몇 차례 연습 질문 뒤에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냐’고 경찰이 물었다. “성폭행…어, 를 당, 당했다는 피해자 그 신분으로 녹음을 하러 왔어요.” 누구로부터 성폭행당했냐는 질문에는 “아, 아빠한테”라고 아름이가 말했다. 하지만 아름이 어머니가 말을 끊었다. “아니,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했어?” 오후 4시45분 진술은 종료됐다. 그 시간 의붓아버지 ㅇ은 센터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번째 기회. 5월6일 국선변호인이 청주청원경찰서에 ‘임시조치 의견보호서’를 제출했다. 의붓아버지 ㅇ을 집에서 내쫓거나, 아름이로부터 100m 이내 접근을 금지하거나, ㅇ을 구치소에 유치해달라는 요구였다. 친어머니에게도 아동학대 범죄 우려가 있다며 긴급 임시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름이와 친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국선변호인이 혼자 내린 결정이었다. 앞서 청주청원경찰서가 받은 ‘진술분석 의견서’(4월28일 해바라기센터 진술에 대한 의견서)에도 ‘친모에 의한 진술 왜곡 및 오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때라도 아름이가 임시조치를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까지 4년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은 위험하다는 경찰 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나를 집으로 보내지 않았고 쉼터에 연계해줬다. 쉼터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아빠를 신고했다. 아빠는 다행히 유죄를 확정받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최예원씨의 말이다.5

“임시조치라는 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못 가게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만약 가해자에게 가면 임시조치가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아름이)가 일관되게 (성폭행당했다는) 진술을 번복하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가해자-피해자 분리는 구속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5월10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청주청원경찰서 관계자의 설명이다. 청주시청 관계자는 “아름이를 (가해자로부터) 분리시키고자 노력했다. 문자도 보내고, 안전을 확인하며 친해지려고 했지만 (아름이가) 거리를 두고 무관심해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름이가 남긴 유서 “유서가 도움됐으면”

12월10일 오전 10시 청주지법 223호. ㅇ의 1심 판결 결과가 나오는 날, 100여 명의 시민이 법정을 메웠다. ㅇ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미소에 대한 성폭행(강간 등 치상)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고, 아름이에 대해서는 유사성행위와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등만 인정됐다. 재판부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의 진술 등에 비춰 (성폭행했을 거라는) 강한 의심이 든다. 그러나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범죄를 증명하기에 부족하다”며 아름이에 대한 성폭행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5월12일 숨지기 전 새벽 아름이는 의붓아버지가 자신만큼은 성폭행한 적이 없다는 유서를 써서 남겼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버지는 저에게 그런 행동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무죄입니다.’ 탄원서에 가까운 유서였다. 아름이 어머니는 이 유서만 경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두 번째 유서가 있었다. 경찰은 이를 뒤늦게 입수했다. ‘내가 쓴 편지가 아빠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나 키워주셔서 졸라 감사합니다.’

11월23일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아름이가) 의붓아버지를 보호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의사는 검찰 증인신문에서 “아름이는 정신과에서 첫 진술을 할 때만 해도 명확하게 말했다. 이후 진술이 이어질수록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아주 작게 말했다”고 진술했다.

“학교·군대·공무원 등 폐쇄적인 집단에서 성폭력이 일어나면 피해자는 안전하게 숨쉬기 어렵다. 진로, 경력, 생계 모든 것이 투영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지면 죽음을 통해 억울했고, 보호받고 싶었다는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아름이를 원망하면 우리 딸의 죽음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부모가 버린 친구(아름이)와 미소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마음이 들어요. 두 아이의 억울함을 끝까지 밝히려 합니다.” 미소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름이 어머니는 “아름이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

5월22일 두 소녀가 잠든 자리, 아파트 단지 화단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나무 아래 하얀 국화꽃이 쌓였다. 친구들이 사다준 군것질거리도 보였다. 아름이와 미소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친구들도 나무 아래 편지를 소복하게 쌓아가며 답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그곳에서 이젠 쉬어’ ‘보고 싶다’ ‘사랑해’. 비에 젖은 몇몇 편지의 잉크가 번졌다.

2021년 5월22일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단지의 화단에 하얀 국화꽃이 편지와 함께 쌓였다. 친구들은 열흘 전 세상을 등진 아름이와 미소(가명)를 추모하며 군것질거리를 두고 갔다. 이정규 기자

2021년 5월22일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단지의 화단에 하얀 국화꽃이 편지와 함께 쌓였다. 친구들은 열흘 전 세상을 등진 아름이와 미소(가명)를 추모하며 군것질거리를 두고 갔다. 이정규 기자

청주=이정규 기자 jk@hani.co.kr

참고 문헌
1. ‘외상후인지가 성폭력 피해 여성의 심리적 후유증에 미치는 영향’, 김소향·최지영, 보건사회연구, 2018
2. ‘성폭력 피해자 사례분석을 통한 지원체계 개선방안 연구’, 이미정·이인선·김기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3
3. ‘아동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자살 행동 유형에 미치는 영향: 잠재계층 분석을 중심으로’, 김수정, 보건사회연구, 2018
4.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2차 피해 유발요인 분석을 통한 예방책 모색’, 이귀형·박종철, 한국치안행정논집, 2018.
5.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친족성폭력 생존자의 기록>, 최예원 등,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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