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서울여성회 등 154개 여성시민단체가 주최하는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0주기 추모행동’ 집회가 열리기 전에 한 참가자가 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1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일면식 없는 여성을 살해한 30대(이하 범행 당시 기준) 남성 김성민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여성들이 나를 견제한다.’ ‘지하철에서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은 전부 여자였다.’ ‘내 업무가 식당 서빙에서 주방 보조로 바뀐 것은 여성이 나를 음해했기 때문이다.’ 김성민이 경찰 범죄분석관(프로파일러)과 한 면담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이처럼 김성민이 갖고 있던 성별에 근거한 적대 또는 편견은 여성 살해로 이어졌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혐오범죄가 아니라고 단언하며 그의 범행을 정신질환 범죄로 규정했다. 김성민에게 징역 30년(2017년 4월 확정)을 선고한 법원의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남성의 성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간주)와 타자화(개인 간 차이를 뭉개고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 여성 멸시를 ‘여성혐오’(미소지니)라고 했다.(책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 2022) 김성민은 ‘나를 위협하는 집단'이라는 범주 안에 여성을 가두는 타자화와 그에 따른 여성 멸시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당시 정부는 김성민의 범행에서 여성혐오로 촉발된 폭력이라는 맥락을 지웠다. 이후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2016년 6월1일 마련한 종합대책은 범죄 취약지역 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 확충, 남녀 화장실 분리 설치 확대, 여성 대상 강력범죄 취약지역 순찰 강화 같은 ‘환경 개선’과 ‘치안 강화’를 앞세웠다.
그러나 이후로도 여성을 멸시하거나 성적 대상화(타인을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나 물건으로만 취급)하는 남성이 일면식 없는 여성의 신체에 중대한 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빼앗는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2022년 5월22일 부산 부산진구 서면에서 30대 남성 이아무개(2023년 9월 징역 20년 확정)가 강간을 목적으로 귀갓길 여성의 뒷머리를 수차례 발로 차서 실신시킨 다음 살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보도를 보고 여성을 기절시키고 시시티브이가 없는 곳에서 성폭력을 저지르기로 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 이가 최윤종이다. 30대 남성 최윤종(2024년 8월 무기징역 확정)은 2023년 8월17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공원 등산로에서 강간을 목적으로 30대 여성을 살해했다. 그는 범행 이틀 전부터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차지한다”와 같은 메모를 작성하고 살인 관련 기사를 다수 열람했다.
당시 정부는 최윤종 사건과 조선의 서울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2023년 7월21일), 최원종의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2023년 8월3일) 등을 모두 ‘묻지마식 강력범죄’로 묶어 그해 8월17일 ‘묻지마 범죄 관리·감독 대책’을 발표했다. 그 대책이란 형법 개정을 통한 ‘가석방(형기 만료 전 조건부 석방)을 허용하지 않는 무기형’ 신설 추진, 지역별 다중밀집장소에 경찰 배치, 경찰 장갑차 동원 등을 활용한 가시적 위력 순찰, 불심검문 등이었다.
이처럼 젠더를 탈각한 범죄 진단과 대책은 ‘여자니까 맞아도 싸’ ‘여자니까 맞아야 돼’라는 생각을 가진 남성들의 범행을 막지 못했다. 2023년 11월4일 경남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 박아무개(2024년 12월 징역 3년 확정)가 당시 쇼트커트를 한 20대 여성 아르바이트 직원을 보고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며 피해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이 범죄로 영구적 청력 손상을 진단받았다.
이처럼 여성에게 집중되는 젠더기반폭력의 여성혐오 맥락을 은폐하고 치안 강화를 통해 가해자의 범행 기회를 차단하려는 대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범행 억제에 효과가 없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이전 정부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20대 남성 장윤기는 2026년 5월5일 광주에서 여고생을 살해하고 ‘살려달라'는 여고생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남고생을 살해하려 했다. 그에 앞서 같은 가게에서 일한 외국인 여성을 강간했고, 그 뒤에 그 외국인 여성을 살해하려고 준비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5월11일 자신의 엑스(X) 계정을 통해 밝힌 정부 대책은 ‘순찰 강화’였다.
강훈식 실장은 경찰청에 “범죄 취약 시간대와 장소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고, 통학로 안전진단을 실시해 방범시설을 보강하는 등 10대 학생들이 불특정 공격에 노출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5월14일 수석보좌관회의 머리발언에서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청소년과 여성 등 사회적 약자 대상 범죄에 전면전 선포 이런 마음가짐으로 예방과 대응 체계를 대폭 강화해야 되겠다”며 “국민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범죄 우려 지역에 대한 특별 치안활동도 철저하게 이어가고, 피해자를 향한 온라인상의 2차 가해는 일벌백계해야 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젠더 관점은 없었다.
“2016년 5월17일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 살해 사건들이 발생했다. (…) 반복되는 여성 살해, 반복되는 실패에 ‘엄중한’ 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만이 반복된다. 그 동일한 풍경이 참담하다. 여성들이 우연히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사회, 여성들이 우연히 살해당하는 사회,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 성차별이라는 많은 시민들의 지적에도 ‘그것’만은 원인으로 꼽지 않는 사회, 그리하여 다시금 피해자의 생명을 지키는 데 실패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문제의 본질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6년 5월12일 발표한 논평 내용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5월13일 “국가는 폭주하는 남성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일면식 없는 여성 대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회는 ‘묻지마 살인’ ‘이상동기 범죄’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이런 방식은 원인을 소거하고 가해자를 쫓아가는 추리의 재미만을 보여준다”며 “지금 일어나는 아는 여성과 모르는 여성 대상 살인은 여성혐오가 원인이다. (…) 그러나 국가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여성혐오를 어떻게 부추기는지, (어떻게) 실천에 옮기게 하는지, 성차별과 동의 없는 성폭력 문화가 어떻게 여성폭력을 ‘연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지 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 1615호 특집: 장윤기 살인 사건 바로보기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379.html
<강남역과 광주, 모두 ‘여성’이어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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