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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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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해, 빌어” 메시지창 가득한 비수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학대받던 동생의 자살…젠더폭력으로 인한 죽음이 “개인적 우울감이나 가정 문제, 애정 문제로 치부돼”
등록 2021-12-26 14:45 수정 2022-12-09 07:10
고 차승현씨가 생전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에서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차승현씨 유족 제공

고 차승현씨가 생전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에서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차승현씨 유족 제공

인도에선 2020년 2만2372명의 기혼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영국 방송 <비비시>(BBC)가 최근 보도했다. 하루 평균 61명, 25분마다 1명이다. 이 보도에서 인도의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한국 사회라고 다를까. 중앙심리부검센터가 2020년 발표한 ‘자살 사망자’ 566명의 심리부검 결과를 보면, 40~50대 여성은 가족 관련 스트레스가 극단적 선택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언론보도를 검색해도 ‘가정불화로 극단적 선택을 한 주부’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정불화’라고 썼지만 ‘가정폭력’이라고 읽힌다.
드러난 범죄만 놓고 봐도 한 해 3만여 명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다. 90% 이상은 여성이 피해자다. 성폭력 피해자의 높은 ‘자살 생각’과 ‘자살 시도율’은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제 절망하나. 존재가 훼손됐을 때, 더 나은 인생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절망한다. 성폭력과 아내폭력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페미사이드(남성의 여성살해) 사건들을 심층취재하고 있는 <한겨레21> 제1394호에선 자살이라는 이름 뒤에 은폐된 범죄를 살폈다. 성폭행 피해를 호소한 뒤 세상을 떠난 중학생들, 배우자의 가스라이팅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의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죄, 사실상 ‘암수살인’이다.
여성을 살해한 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남성들의 사례도 언론보도 검색을 통해 수집·분석했다. 가장 파괴적인 범죄이지만 이 또한 범죄통계에 기록조차 되지 않는다. 이 죽음들을 ‘범죄’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 한, 성평등한 사회의 약속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_편집자주

“활동적이고, 자전거도 많이 타고, 동호회도 다니고, 친구들 만나 이야기도 잘하던 동생이었어요.”

동생 승현(28)의 모습을 차미연(가명)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승현씨는 2021년 7월28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가족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동생의 고통을, 미연씨는 그의 죽음 뒤에야 알게 됐다. 장례식장에서 승현의 휴대전화를 동생 남편 ㄱ(32)에게서 돌려받아 카카오톡 채팅방에 남겨진 ㄱ과 승현의 대화 내용을 보고 미연씨는 “손발이 떨렸다”. 전체 대화 내용을 읽은 뒤에야 깨달았다. “가스라이팅 피해자의 전형적인 패턴이구나.” 동생의 죽음은 타살이나 다름없었다.

친구들 채팅방에도 끼어 들어와

가스라이팅은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쉽게 조정하려는 행위’를 뜻한다.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만들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식이다. 가스라이팅을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1

ㄱ과 승현씨는 9년간의 교제 끝에 2020년 3월 결혼했다. “관계 초반에는 ㄱ이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가 점차 모든 일을 동생의 잘못으로 돌리고 다른 인간관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미연씨는 말했다. ㄱ은 승현씨에게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내가 널 제일 잘 알아. 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나야. 그러니 나에게 잘해.” “모두 네가 잘못한 거야. 이번에도 네 잘못(인데) 나니까 참고 사는 거야. 복종해. 빌어.”

가스라이팅 범죄의 패턴을 살펴본 연구1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구축하고 △자신의 정신적 지배력을 강화해 정신적 학대를 반복하며 △비정상적인 심리 통제 이후 물리적·신체적 가해와 살인 등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고 △피해자 대부분 학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 기간이 길고 적발되더라도 형사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가스라이팅의 특징으로 꼽는다. 예컨대 피해자에게 “네가 잘못했어” 같은 메시지를 반복 주입한다.

ㄱ과 승현씨의 대화 패턴은 정확히 이 연구의 분석과 일치한다. 승현씨가 사과하고 나면 ㄱ은 한없이 잘해주다가도 심사가 뒤틀리는 날엔 폭언이 시작됐다. 이유는 늘 사소했다. 앞치마를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사지 않아서, 라면을 끓일 때 수프를 한 봉지 다 넣어서, 영화 취향이 달라서 등이다.

승현씨는 친구나 가족과 연락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연애할 때도 승현씨가 다른 친구와 만나는 날이면 ㄱ과는 1시간 가까이 전화 통화를 해야 했다. ‘너는 저 친구랑 만나면 안 돼. 몸이 아프다고 말해’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지 나에게 보고해’ 등의 메시지가 왔다. 친구들이 승현씨의 결혼을 앞두고 파티를 열어주려고 하자 ㄱ은 기어이 그 자리까지 쫓아왔고, 승현씨와 친구들이 만든 채팅방에도 끼어 들어왔다. ㄱ은 그 채팅방에서 성희롱 발언을 쏟아내거나 성적인 사진을 시시때때로 보냈다.

자살 통계 ‘젠더 기반 폭력’ 항목 구분 필요

“대학생 때는 (ㄱ이) 집착이 심하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었다. 폭언하거나 물건을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승현이 같이 싸우기도 했는데 (교제 기간이) 길어지면서 잘못된 행동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다”고 미연씨는 말했다. 승현씨 가족과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ㄱ은 “너희 가족은 너를 딸이라고 생각 안 해. 가족은 이제 나뿐이야. 정신 차려” 등의 말을 승현씨에게 지속적으로 했다고 미연씨는 전했다. 승현씨 어머니와 ㄱ이 신혼집 전세 비용 문제로 갈등을 겪은 뒤에는 정도가 심해졌다. “‘가족 만나지 마라, 가족이 얘기하는 걸 듣지 마라, 어떤 대답도 하지 마라’는 식의 대화가 이어지더라고요.”

미연씨는 장례식장에서 동생의 친구들로부터 “(승현이) 사소한 일상생활마저 통제당해 울고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이 가족에게 알리라고 설득했지만 승현씨는 “차마 가족에게 알릴 수 없다”며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 했다. 2021년 6월 부부상담도 받아봤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미연씨는 “아마 승현이는 ㄱ한테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승현씨 죽음은 아내에 대한 폭력의 피해로 집계되기 어렵다. 가스라이팅 범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직 사회적·법적으로 자리잡지 못한데다, 연인·가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이 발현돼도 스토킹·폭력·협박·감금 등 다른 형태의 폭력이 함께 수반되는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

통계청이나 경찰에서 자살 통계를 작성할 때 ‘젠더 기반 폭력’ 항목을 구분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는 “통계 집계 항목상 데이트폭력, 성착취, 가정폭력, 디지털성범죄 등은 자살의 이유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설명되어야 할 집단적 경험들은 개인적 우울감이나 가정 문제, 애정 문제로 치부되어왔다”고 지적한다.2

미연씨가 공론화를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심리적 지배가 사실 법적으로 처벌도 안 되고 범죄로 인식도 되지 않거든요. 가스라이팅이 무엇인지 알리고 싶었어요.” 그는 2021년 9월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가스라이팅 및 가정폭력으로 제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사관의 처벌을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한 달 동안 24만 명의 동의를 받았다.

협박·폭행 등 9개 혐의로 고소

쉽진 않았다. ㄱ 쪽은 “(승현이) 원래 우울증이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데 내 탓으로 돌린다”고 주장했다. 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사기관들은 “직접적으로 살해한 게 아니라 처벌이 곤란하다”는 식의 대응을 반복했다. 그나마 ㄱ과 동생의 대화 내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뒤 미연씨는 동생과 비슷한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을 마주하게 됐다. 비슷한 피해를 겪은 이들이 연락해왔다. 미연씨는 언젠가 직접 이들을 만나 모임을 꾸리기를 바란다.

승현씨 유족은 2021년 9월 국방부에 피해 사실을 알렸다. 사건은 군경찰 조사를 거쳐 12월부터 군검찰에서 수사 중이다. 유족은 승현씨와 가족에게 했던 협박·폭행 등 9개 혐의로 ㄱ을 고소했다. 유족이 바라는 건 하나, ㄱ의 행위가 ‘살인에 이르는 행위’임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미연씨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서 간섭하고 통제하고 결국 지배해서 동생이 파멸로 이르게 됐다. (ㄱ의 행위는) 정서적인 폭력으로 인한 살인 행위”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 피해를 당하기 전 동생의 모습을 그는 또렷이 기억한다. “ㄱ을 만나기 전 승현의 원래 모습 그대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요.” 사진 속 승현씨는 활짝 웃고 있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참고 문헌
1.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한 가스라이팅 범죄의 진행과정에 관한 연구’, 오세연·송혜진, 한국융합과학회지, 2021
2. ‘코로나 시기 20대 여성의 자살률 증가와 젠더폭력’, 김홍미리, 한국가족학회 춘계 학술대회 발표문, 2021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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