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가 2021년 10월15일 저녁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수의원에서 한겨레와 직격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leprince@hani.co.kr
그가 왼쪽 눈을 뜬다. 느릿한 무성영화처럼.
“가.”
문득 말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단음절이다.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병상 난간으로 바짝 당겨 앉는다. 모로 눈길 보내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오른쪽 눈은 여전히 뜨지 못한 채다.
“가라고.”
세 음절의 소리가 매정하게 못을 박는다. 건강했을 때도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써 정을 떼보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어서 가서 설문지 돌려야지.”
사람을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강한 신경안정제 탓에 옅은 섬망 상태를 보일 수 있다는 귀띔을 듣긴 했다. 그렇더라도 뒤죽박죽된 의식의 서랍 밖으로 불현듯 삐져나온 파편이 하필 설문조사라니.
1분쯤 지나 다시 눈을 뜬 그가 이번에는 두 문장으로 말한다.
“무슨 사업이든 해낼 수 있잖아. 의지만 있다면.”
사람도 상황도 착각하고 있지만, 의식 아래에서 삼투돼 올라오는 기억들에 그 나름대로 계통이 서 있음을 그제야 알아챈다. 기억의 파편들은 타일 무늬처럼 고른 패턴을 이루고 있다. 그는 호스피스 병실에 누워, 개인사도 가족사도 아닌 보건의료운동사의 중력장 안을, 느리지만 안간힘을 다해 유영하고 있다. 배영이다.
의사 우석균 선생이 생을 마쳤다. 2026년 6월7일 국립중앙의료원(서울 중구 을지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항년 64.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와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지낸 그가 초대형 민간병원이 아닌 공공의료기관에서 눈감은 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보건의료운동가로서의 ‘완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립중앙의료원은 ‘국가 공공의료 선도’를 존재 이유의 첫 줄에 내세운다(국립중앙의료원법 제1조). 그는 공공의료 안에서 잠들었다.
호스피스 돌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녹색병원(중랑구 면목동)에서 투병했다. 녹색병원은 집단으로 직업병에 걸린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원진재단의 부설 기관이다. ‘건강한 몸, 건강한 노동, 건강한 사회 실현을 위한 공익형 민간병원’을 표방한다(녹색병원 누리집). 그가 여기에서 받은 치료와 돌봄은 밖에서 몸소 펼친 그것들과 밭은 시차를 두고 ‘공익’의 궤도를 따라 공전했다.
우 선생은 2025년 초 위암 진단을 받았다. 이미 4기였다. 암세포가 처음 몸속에 뿌리내린 시기는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발견이 늦어진 사정은 상대적으로 또렷했다. 성수의원(성동구 성수동) 원장으로 지역 필수의료와 보건의료운동의 최전선을 지키느라 제 몸 하나 제때 돌보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을 터다. 그는 24년간 성수의원을 책임졌다. 위암 4기 진단을 받고도 8개월을 더 버텼다. 성수의원만을 와야 하는 환자들이 있던 터였다.
성수의원은 1988년 문을 열었다. 당시 성수동은 영세한 제화·인쇄·염색 업체가 밀집한 공장지대였다. 일하다 다치고 병드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성수의원은 그들을 치료하고 돌보기 위한 1차 병원이었다. -비슷한 취지로 사당의원(1985년)과 구로의원(1986년)이 조금 앞서 개원했으나, 먼저 문을 닫았다.- 양길승 초대 원장이 2001년 녹색병원 설립을 위해 떠나면서 인의협 정책실장이던 우 선생이 소임을 이어받았다.
그때부터 전화 연결이 어려워졌다. 밤이 이슥해져 회신하는 게 뉴노멀이 됐다. 매번 녹초가 된 목소리였다. 의약분업 사태(1999~2000년) 때는 언제든 전화를 걸어도 바로 받았다. 국내외 데이터와 사례, 논리로 의사 쪽 주장을 반박하는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어내던 그때 기억은 금세 아득해졌다. 그는 베이고 찢긴 노동자들을 치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임상의로 변모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를 지낸 우석균 성수의원 원장 빈소가 2026년 6월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성수의원을 책임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 선생한테는 보건의료정책 전문가의 면모가 도드라졌다. 인의협 상근 시절, 한겨울 명동성당 앞 노숙농성자나 서울역 앞 노숙인들을 진료하러 갈 때면 “주사 놓는 법을 까먹었다”고 농을 했다. -물론 능숙하게 주사를 놓았다.- 그는 본디 가정의학 전문의였고, 대학원에서는 보건정책을 전공했다. 그러고는 20년도 더 지난 뒤 강단 학제를 횡단해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의 늦깎이 공부는 학구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건의료운동의 역량을 넓히고 심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경제학 석사 논문(2013년)의 주제는 ‘지식재산권’이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특허가 공공의료에 미치는 악영향을 명징한 데이터와 가지런한 이론으로 갈파했다. 보건의료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상충하고 노골적으로 강요되는 장소임을 그렇게 보여줬다.
2021 년 10 월 하순 , 성수의원을 찾아갔다 . 그의 공부를 염두에 둔 방문이었다. 코로나 19 대응 전략을 ‘ 사회적 거리두기 ’ 에서 ‘ 단계적 일상 회복 ’ 으로 바꾸려는 정부 정책을 두고 감염학 전문가들이 연일 방송에 나와 갑론을박하던 무렵이었다 . 그들의 갑론을박은 분과 학문 안에서 맴돌았다 . 마스크를 벗느냐 마느냐의 의학적 판단과 삶이 무너진 사회적 약자들의 회복 가능성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였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진료 마감 시간이 30분쯤 지나서야 가쁜 숨을 내쉬는 우 선생과 마주 앉았다. “이 동네는 백신 휴가를 쓸 수 없는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라 금요일 일과가 끝난 직후 접종자들이 몰린다.” 감염학 교과서엔 나오지 않을 얘기였다. 그는 국제 의학 저널 ‘랜싯’의 논문부터 컴퓨터 모니터에 띄웠다. 대화 도중에도 세계보건기구(WHO)와 여러 비정부 국제기구의 최신 보고서를 부지런히 열고 닫았다.
우 선생은 머잖아 3차 대유행이 오고, 여태 2600명대이던 누적 사망자가 최대 5만 명까지 급증할 거로 내다봤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코로나 재정지출부터 상급종합병원들의 코로나 병상수까지, 문외한에겐 연관성이 짚이지 않는 온갖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 진료의 최일선에서도 전방위적인 공부를 멈추지 않은 그의 전망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얼마 뒤 3차 대유행이 실제로 닥쳤다. 훗날 최종 집계된 누적 사망자는 3만5605명이었다.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듭하다 치명성이 수굿해져 5만 명에는 이르지 않았다. 요행이었다.
그날 세 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말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한국을 ‘백신 허브’로 만드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백신 불평등을 해소하는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재산권을 유예하고 기술이전을 해야 한다고 밝혀달라. 북한에 백신을 조건 없이 무상 공급하겠다고 약속해달라. 남북 평화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윤보다 생명을’ 표지 이미지.
보건정책에서 시작해 평등과 평화의 실천 담론으로 뻗어 나간 그 인터뷰이에게 ‘보건의료정책 전문가’라는 호칭은 옹색하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그의 행장(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 맨 앞에 놓기에 맞춤한 호칭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리좀’을 겨우 떠올려본다. 뿌리-기둥-가지의 구성을 따르지 않는 뿌리줄기 식물의 메타포.
그가 남긴 글들을 추려 모으는 것이 그나마 그의 생애를 정리하는 현실적인 방편인지도 모른다. ‘이윤보다 생명을’(책갈피, 2025년 11월)을 펴낸 지인들의 속마음을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실천하는 의사 우석균 저작선’이라고 부제를 달 때까지 길고 깊었을 그들의 고민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의 글감들을 몇 마디로 통약하는 건 애초 불가능에 가까웠다.
1장 ‘보건의료와 한국 사회’로 시작한 책은 ‘자본주의와 생태’ ‘자유무역협정과 건강’을 지나 ‘의료 민영화 반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 ‘노동자와 보건의료’ ‘반전평화운동과 보건의료’ ‘운동 안의 논쟁’ ‘대안을 찾아서’까지 총 9장으로 이루어졌다. 9개의 장이 곧게 서지 않고 뿌리줄기 식물처럼 꿈틀거리며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걸 알 수 있다. 하나의 장 안에서도 글감은 여러 갈래로 뻗친다. 가령 2장(자본주의와 생태)은 ‘바이러스와 자본주의’ ‘광우병’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기후변화’라는 3개의 하위 장으로 구성돼 있다.
우 선생은 밭을 가리지도 않았다. 대중매체부터 운동단체 기관지, 학술지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써왔다. 그러나 단독 저서는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시의성과 현장에 밀착한 글을 천착해왔다는 방증이다. 이 책 또한 하나같이 책상머리가 아닌 운동의 최전선에서 길어 올린 ‘뜨거운 글’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뜨거웠던 그의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책날개에 실린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정책위원,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운영위원, ‘의료와 사회’ 편집위원 등의 이력은 그가 지나온 험한 길에 세워진 수많은 이정표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이 2013년 4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부 앞에서 진주의료원 정상화를 촉구하며 5일째 단식농성을 벌일 때의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우 선생이 쓰러지면서 성수의원도 문을 닫았다. 2025년 8월25일이었다. 이미 성수동은 메가시티 서울의 나르시시즘적 소비를 상징하는 동네로 변해 있었다. 전공의 파업이 끝 간 데 없던 2024년 6월 성수의원을 찾았다. 그는 “성수동 풍경이 하루하루 초현실적으로 변해간다고 느꼈는데, 어느 날 보니 성수의원이 외려 초현실적으로 키치한 곳이 돼버렸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국밥을 먹기 위해, 그가 오랫동안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던 성수동 일대를 20분 넘게 헤매다녀야 했다.
국밥을 한 술 입에 떠넣으며 그가 말했다. “성수동에서 중노동 하며 살다 거주비용이 폭등해 내쫓긴 노인이 적지 않다. 실손보험이 없는데 도수치료 같은 비급여 치료를 요구받으니 그 지역 의원은 놔두고 애써 여길 찾는 거다. 과잉진료 하는 의원들은 성수동의 휘황한 가게들과 다를 바 없다. 정작 가정의학과나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같이 지역에 꼭 필요한 과목은 소멸하고 있다.” 성수의원은 문을 닫기 전까지 필수의료의 최전선을 지켰다.
성수의원이 문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향신문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차가운 시선에 지친 장애아동과 그 부모들, 으리으리한 병원들의 비급여 주사 권유에 지친 할머니들, 호르몬 치료를 거부받은 성소수자 등이 병원으로 모여들었다”고 돌이켜 보도했다. 신문은 지적장애 아들과 함께 24년 동안 성수의원을 오간 어머니가 우 선생을 ‘슈바이처’라고 표현한 대자보 사진을 실었다. 그 헌사는 곡진했으나, 얼굴 양면을 동시에 비추지는 못했다. 다른 한쪽에는 체 게바라나 프란츠 파농 같은 의사 출신 투사가 어른거린다.
우 선생의 경제 사정은 그의 환자들보다 딱히 나을 게 없었다. 그의 암 선고 소식이 알려졌을 때 지인들은 치료비부터 걱정했고, “돈 걱정은 말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그 흔한 실손보험, 암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았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싸움의 자기 실천적 전술이었다. 눈에 띄게 쇠잔해진 채로 성수의원을 지키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의외로 치료비가 적게 나온다. 의료 공공성이 갈수록 의료 민영화에 밀리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는데, 아주 헛산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또박또박 내딛는 발걸음처럼. ‘상록수’다. “저 들에 푸르른….” 자신의 연주에 맞춰 부르던 노래는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에 이르러 멈춘다. 처음부터 목이 잠겨 있었으나, 딱히 고음부는 아니다. 울컥한 거로 보아 감정이 복받친 듯하다. 연주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에 해당하는 마디를 지나 비로소 끝난다. ‘완주’다.
이제 소파로 옮겨 앉아 기타 연주를 시작한다. ‘동지를 위하여’다. 곁에 있던 이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그대 가는 산 너머로 빛나던 새벽별도/ 어두운 뒷골목에 숨죽이던 흐느낌도/ 피투성이 비구름 되어 진달래 타는 언덕 되어/ 머물 수 없는 그리움으로 살아오는 동지여” 그의 눈빛은 머나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깊은 그리움으로 어느덧 아련해져 있다.
2025년 11월22일, 인의협 창립기념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녹색병원 병실을 나선 우 선생이 보건의료운동을 함께해온 지인 집에 잠시 들른 참이었다. 인의협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취지에 뜻을 함께하는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1987년 11월21일 창립했다. 누구보다 세상을 아파했던 의사의 손끝에서 나온 연주는 능숙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가오는 음표를 꾸밈없이, 다만 담담하게 감당하는 생의 마지막 연주였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고 우석균 선생 보건의료운동 연보
• 1962년 2월9일 출생
• 1980년 3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 1987년 11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창립 발기인으로 보건의료운동 투신
• 1999년 인의협 정책실장을 맡아 의약분업 사태에서 시민사회의 대안적 목소리를 이끎
• 2001년 성수의원 인수. 2025년 8월31일까지 지역사회의 1차의료를 책임지는 의사로 활동
• 2001년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보건의료단체연합) 창립 주도하며 진보적 보건의료 연대 구축
•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때 한겨레, 시민사회와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폭탄이 아니라 의약품을’ 캠페인 진행. 이라크에 직접 진료지원 다녀옴. 이후 반전운동, 팔레스타인 점령 반대운동 등을 정력적으로 펼침
• 2006~2008년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으로 광우병 대책위 및 한미FTA 반대 전문가 자문위원으로 활동
• 2008년 광우병 대책위 및 한미FTA 전문가 자문위원 등과 함께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창립. 다학제적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을 바탕으로 먹거리 안전, 자유무역과 건강, 자본주의와 감염병 등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건강 문제에 대응하는 기틀 마련
• 2008~2013년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위원장으로 의료민영화·영리병원 저지 투쟁 전개
• 2013~2014년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진주의료원 강제 폐업 사태에 맞서 공공의료 수호 투쟁 전개
• 2015년 메르스(MERS) 사태 때 정부의 불투명한 방역을 비판하고 공공방역 체계 및 감염병 전문병원 확충 촉구
• 2020~2022년 보건의료단체연합 및 인의협 공동대표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공공병상 확보, 취약계층 보호, 백신 특허 면제 국제 연대 운동 주도
• 2024년~2026년 2월 의대 증원 및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 이익단체와 정부 모두를 비판하며, 공공의대 신설 및 지역의사제 중심의 공공의료 개혁 대안 제시
• 2026년 6월7일 위암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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