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6월1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6·3 지방선거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이번 사태(투표용지 부족 등 부실선거)의 더 큰 문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부정선거 담론에 길을 열어줬다는 점입니다.”
2026년 6월10일 고려대 시국선언 자유발언에 나선 한 정치외교학과 학생의 말이다.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등 부실선거 사태 이후 대학가에서 쏟아진 목소리는 서울 송파구 잠실올림픽공원(올공) 시위 현장에서 주로 나온 부정선거론과 결이 달랐다. 학생들은 이번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 제기보다는 투표용지 부족 등으로 발생한 참정권 침해와 이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책임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
올공 시위 현장에서도 처음에는 참정권 침해와 부정선거 의혹 제기가 뒤섞여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올공 시위 현장에선 ‘부정선거’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재선거’ 구호가 더욱 힘을 얻었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지도부 등이 합류해 이 담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자 대학가에서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6월10일 연세대와 고려대 등 전국 18개 대학이 모인 한국대학총학생회 공동포럼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이다. 공동포럼은 이번 사태를 “국가기관의 관리 부실로 인한 참정권 침해”로 규정하며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도입, 책임자 처벌, 선관위 개혁을 중점적으로 요구했다.
대학 총학생회가 6월16일까지 발표한 성명문에 담긴 내용을 통계로 내보면, 학생들이 강조하는 대목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한 시민이 직접 개발한 웹페이지 ‘한 표의 기록’이 6월3일 지방선거일부터 6월16일까지 14일 동안 대학교 학생회가 낸 성명문을 취합해보니, 이 기간 220개 대학의 학생회에서 총 437건(단과대, 캠퍼스별 별도 집계)의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표의 기록’이 집계한 결과, 대학 학생회 성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요구는 이번 사태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283건·65%)이었다. 이어 ‘선관위 및 관계 당국 규탄’(215건·49%), ‘진상 규명’(173건·40%), ‘책임자 처벌·사퇴’(133건·30%), ‘공식 사과’(128건·29%), ‘선거제도 개선’(79건·18%) 순으로 나타났다. ‘재선거’나 ‘재투표’를 요구한 성명은 27건(6%)에 그쳤다. 학생들의 문제의식이 참정권 침해의 원인을 규명하고 선거관리 체계를 개선하는 데 집중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학생들은 성명이 정치권의 당파적 해석에 이용당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이번 사안을 특정 진영의 유불리를 따지는 정치적 공방의 대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서강대) “오늘 우리는 특정 정당의 승패를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진영의 유불리를 계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도 아닙니다.”(한국외국어대) 이런 내용의 문장이 여러 성명에 담겼다. 6월10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대학생 간담회를 개최한 뒤 공동포럼 쪽이 ‘총학생회 포럼과 무관하다’는 뜻의 공지문을 낸 것도 이런 취지의 연장선이었다.
대학생 사이에서 가장 호응받은 목소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부상한 부정선거론과 극우세력을 단호히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국선언 자유발언에 나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김아무개씨는 “부정선거는 이미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선관위의 무능과 안일함이 시민 불신을 자극하고 음모론이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계엄을 옹호하고 폭력을 정당하게 하던 세력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금 자신들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며 “민주주의 원칙을 부정했던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해 전면에 등장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널리 공유되며 공감을 얻었다.
전문가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나온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섣불리 규정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이들의 문제의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청년들이 공정과 절차적 정당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 어떤 정치적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며 “현재로서는 청년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이번 현상을 새로운 흐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2030세대는 낮은 정치적 대표성과 사회·경제적 불만을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그런 불만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혜민 뉴웨이즈 대표는 “청년세대는 민주주의와 투표를 당연한 권리로 배우고 자란 세대인데, 기본적으로 작동해야 할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며 “기성세대가 만든 제도와 시스템이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나온 청년들의 분노를 기성세대가 분석 대상으로만 소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투표용지 부족 등 부실선거 사태는 정부·여당과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리얼미터가 6월8~12일 전국 18살 이상 유권자 2515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무선자동응답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0%포인트)를 한 결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51.5%로 전주보다 3.7%포인트 하락했다. 리얼미터는 선관위 부실선거 논란과 이에 따른 정국 혼란 등을 지지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분석했다. 박혜민 대표는 “초기 대응 과정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소통하려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며 “국민이 기대한 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와 설명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선관위가 독립기관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국민은 정부와 정치권 전체를 바라본다”며 “행정부와 국회가 함께 해결 방안을 만들고 이를 지속해서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청년세대가 제기한 참정권 침해 문제와 선거 관리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 정치권이 응답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병근 교수는 “지금 필요한 것은 선관위 해체나 개헌 같은 선언적 구호가 아니라 선거 사무 능력을 어떻게 높일지에 대한 실질적 대안”이라며 “투·개표 관리 체계와 행정부-선관위 협력 구조를 점검하고, 선거 관리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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