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 한 번씩 이 칼럼의 마감일이 다가올 때마다 저는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는’ 심정이 무엇인지를 실감합니다. ‘이번호엔 또 어떤 주제로 200자 원고지 15장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얘깃거리가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이 고민은 한국 공론장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주간지라는 매체가 겪는 근본적 어려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겨레21> 기자들이 더 절실하게 느끼겠지만, 일주일이라는 발행주기는 기사나 칼럼 주제를 잡기에 참 모호한 간격입니다. 글을 쓰는 건 이번주지만 독자가 글을 만나는 건 다음주니까요. 빨리 끓고 빨리 식는 냄비에 비유할 정도로 이슈가 다이내믹하게 바뀌는 한국 사회에선 지금 ‘핫’한 주제라 하더라도 일주일 뒤 철 지난 소리가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국 공론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나친 ‘쏠림’ 현상입니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야 직성이 풀리고 남들 다 아는 걸 나 혼자 모르면 불안해하는 나라이니, 하나의 이슈가 온 세상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할 땐 코로나19가, 선거가 열릴 땐 선거가 소용돌이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입니다.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니 피로감도 그만큼 빨리 찾아오는 걸까요? ‘쏠림’의 다음 순서는 빠른 ‘망각’입니다. 웬만한 이슈는 대중의 반응과 만나 빠르게 연소해버리고 며칠 만에 다른 이슈에 밀려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립니다. 매번 문제가 해결될 틈 없이 넘어가다보니 몇 년 뒤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초 단위로 콘텐츠가 올라오는 디지털 시대로 접어든 이후엔 이슈의 생애주기가 더 짧아졌습니다. 소셜미디어 공간에선 오늘 심각한 조리돌림을 당한 사람도 하루만 지나면 까맣게 잊힙니다. 이러니 잘못을 저지른 공직자나 정치인이 납작 엎드려 소나기가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권력이 ‘이슈로 이슈를 덮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질 급하고 변덕 심한 여론 환경에는 분명 언론의 책임도 있습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일 땐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가 쏟아지지만, 파업이 끝난 뒤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든 논의가 사라집니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사건들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을 땐 단신으로 소개되는 데 그칩니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이슈에는 기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정도로 샅샅이 파헤치지만, 며칠만 지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철저히 외면하는 게 언론의 행태입니다. 이렇게 빠른 언론의 태세 전환 없이 과연 우리 사회의 집단적 ‘건망증’이 가능했을까요?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쫓았을 뿐이라며 억울해하겠지만, ‘닭(대중)이 먼저냐 달걀(언론)이 먼저냐’를 따지기에 앞서 그간의 취재·보도 관행에 대한 반성은 필요해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몰리는 ‘쏠림’의 시간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벌써 ‘망각’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짜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때라는 말이 있지요. ‘망각’의 시간을 ‘기억’의 시간으로 바꿔낼 의지와 역량이 우리 언론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참사 발생 직후 언론사들은 ‘역대급’으로 많은 취재기자를 현장에 투입해 방대한 뉴스를 쏟아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민들이 더는 이태원을 말하지 않을 때도 이 언론사들은 참사를 이야기할까요? 달력이 다시 10월29일을 가리킬 때 형식적인 ‘1주기’ 기사를 쓰는 것 말고 또 어떤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까요?
손석희 전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 앵커는 전통적 저널리즘 이론에서 말하는 ‘의제 설정하기’(Agenda-setting)를 넘어서는 ‘의제 지키기’(Agenda-keeping)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언론이 단순히 의제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제를 꾸준히 지켜냄으로써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대형 참사가 수습되고, 원인을 규명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최소 몇 달,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대중의 슬픔과 분노는 그 긴 시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대중의 관심이 떠난 뒤라도 참을성 있게 끝까지 매달려 시민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게 언론이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세월호 참사 당시 제이티비시는 200일 넘게 전남 진도 팽목항 현장을 지키며 메인 뉴스에서 리포트를 이어갔습니다. <뉴스타파>와 <한겨레21>은 세월호 침몰과 구조 실패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보도를 집요하게 이어갔습니다. 더 많은 언론이 사고 원인을 추적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의제 지키기’에 나섰다면 우리는 무수한 젊은 생명을 떠나보내는 비극을 반복해서 경험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언론이 ‘의제 지키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정 이슈를 따라가며 꾸준히 기사를 쓰려는 기자들은 데스크로부터 늘 질문을 받습니다. ‘새로운 팩트가 있느냐’ ‘이미 다 나왔던 얘기 아니냐’는 거지요. 이런 질문에는 아무리 중요한 이슈도 새로운 사실 하나를 더 얹지 못한다면 뉴스로서 자격이 없다는 인식이 깔렸습니다.
뉴스 이용자는 오늘 뉴스에 어제와 다른 단편적 사실 하나가 추가됐는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이슈를 친절한 설명과 새로운 접근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실제 나에게 도움을 줬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상과 생업에 바빠 잊고 지내던 이슈를 다시 각인시키는 ‘의제 지키기’ 저널리즘은 뉴스 공급자에겐 별 의미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수요자에겐 뉴스의 유익함을 일깨우는 보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이 생각하는 ‘뉴스 가치’(News Value)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사실’만 뉴스가 될 수 있다는 도그마(독단적 신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끊임없는 이슈 ‘되새김질’에도 뉴스의 자격을 부여합시다. 언론이 먼저 끓어오르고 먼저 식어버린다면 유튜브에 넘쳐나는 ‘사이버 레커’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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