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동 분야를 주로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다룬 기사에는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힘든데, 노동조합과 관련된 기사에는 반대로 좋은 댓글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20년 전만 해도 둘 다 ‘빨갱이’ 냄새가 난다며 금기시했던 노동 이슈인데, 왜 지금은 이렇게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일까요?
한국 사회의 ‘노동 혐오’는 그 뿌리가 깊습니다. 오랫동안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피 대상이었지요.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도 ‘노동자’ 대신 애써 ‘근로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갓물주’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저임금 육체노동자와 비정규직은 멸시당합니다. 청소노동자가 학내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면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강의 듣는 데 방해된다”는 불만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노동시간이나 복지를 비롯해 노동자 처우와 관련한 문제에 민감한 분이 많아졌습니다. 인권 감수성도 전과 달라졌습니다. 산재 사망사고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진 건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산재 사망률이 70%나 높고 연간 노동시간이 200시간 넘게 긴 한국의 위험하고 후진적인 노동 현실은 중산층 화이트칼라 노동자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가 일하다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달라고, 최저임금보다 더 많은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여론은 차갑게 등을 돌립니다. 파업과 집회가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 해도 소용없습니다. 노조의 단체행동을 접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노동 혐오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리트머스시험지입니다.
<국민일보>의 ‘민주노총, 작년 시위 계기 ‘미운털’… 댓글 65%에 ‘부정’ 표현’ 기사(2022년 12월13일치)가 증거입니다. 2021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네이버 기사 537만 개에 달린 1억2천만 개 댓글을 모아 빅데이터 분석을 했더니, ‘민주노총’ 언급 댓글의 65%가 혐오 댓글이라는 결과가 나온 겁니다. 댓글이 전체 여론을 정확히 반영하진 않지만 노조 혐오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왜 이렇게 노조를 싫어할까요? 절대다수 사회구성원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의 가족인데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행동을 왜 한사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걸까요? 산재 사고를 막자는 데 동의하며 견고한 노동 혐오에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한 시민들의 마음이 노조 앞에만 서면 다시 얼어붙는 이유가 뭘까요?
지독한 ‘노조 혐오 사회’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건 ‘노조 혐오 언론’입니다. 노조가 파업을 벌일 때마다 보수 언론은 ‘귀족노조의 떼쓰기’ 때문에 경제위기와 시민 불편이 초래된다는 프레임을 집요하게 씌워왔습니다. 사용자 쪽 주장을 그대로 받아써 피해액을 부풀리며 온갖 ‘대란’이 닥친다는 비명을 지르고 모든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왜곡하며 정부의 ‘엄정 대응’을 촉구합니다.
파업의 이유와 맥락을 알리지 않는 행태도 여전합니다. 얼마 전 파업을 끝낸 화물연대가 요구한 건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와 적용 품목 확대’였습니다. 과로와 과속을 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초장시간 불규칙 노동을 어떻게 바꿀지가 파업의 본질적 쟁점이었습니다. 화물운송 노동자의 건강과 생계뿐 아니라 화물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는 국민의 안전과도 관련 있는 문제지요. 하지만 보수 언론의 보도에서 이런 논의는 늘 뒷전이었습니다.
이들 언론은 노조에 부정적 인상을 덧씌울 수 있다면 가장 기본적인 저널리즘 원칙도 저버립니다. 2022년 6월 쿠팡 노조가 본사를 점거하고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는 기사가 몇몇 언론에 실렸습니다. 그러나 흐릿하게 찍힌 사진에 나온 캔 음료는 맥주가 아니라 커피였습니다. 최소한의 사실확인과 검증조차 하지 않은 게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언론사 기자에게 노조는 아예 취재 대상이 아닙니다. 기업 홍보팀에 수시로 전화하고 보도자료를 받아쓰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사용자 쪽에서 노조를 공격하는 정보를 입수하면 노조에 한 번은 크로스체크를 해봐야 할 텐데 이걸 생략하는 기자가 너무 많습니다. 노조를 때리는 기사는 ‘아니면 말고’여도 상관없다는 인식입니다.
‘나라 망치는 강성 노조’ 타령을 하지만 사실 한국의 노조는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약합니다. 노조 조직률은 고작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고 손발을 묶어놓는 각종 법령 때문에 파업조차 마음대로 못합니다. 쟁의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입법 논의도 교착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언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를 ‘악마’로 만드는 전략에 몰두하는 건 언론사의 지배구조와 수익모델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언론사를 먹여 살리는 소유주와 광고주가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조가 더 위축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기자도 한 사람의 노동자이지만 위계적인 뉴스룸 조직에 속했기에 현장에서 보고 들은 대로 기사를 쓰지 못하고 회사의 논조와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전국언론노조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대표적 경제지인 <한국경제>의 지분 91.5%를 국내 52개 기업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너십에서 노조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는 기사가 나올 리 만무합니다. 노조를 혐오하는 보도를 최소한 중립적으로라도 바꿔놓기 위해서는 자본 눈치를 보지 않고 뉴스 이용자의 호주머니나 공적 영역에서 나온 돈으로 재원을 충당하는 독립적 언론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물론 노조에도 잘못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한 줌의 정규직 기득권을 지키려 비정규직 배제에 앞장서는 일부 노조의 행태는 따끔히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무조건 노조를 편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노조를 천사도 악마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자는 겁니다. 기업에 우호적인 보수 언론이더라도 노조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혐오’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비판’해주길 바란다면 너무 무리한 기대일까요?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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