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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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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정치의 덫에 걸린 언론

정치 양극화 넘어 서로 다른 세계관에서 사는 시대… 언론부터 정파성 유혹 뿌리쳐야
등록 2022-06-12 12:28 수정 2022-06-13 02:15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임명된 2022년 5월17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계단에 한 장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임명된 2022년 5월17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계단에 한 장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바야흐로 ‘세계관’의 시대입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아이돌이나 콘텐츠에서 빠지지 않는 것. 바로 배경이 되는 자기만의 세계관, 탄탄하고 일관된 서사로 구성된 가상의 ‘유니버스’입니다. 이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끼리 긴밀히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팬덤이지요.

세계관은 더 이상 케이(K)팝, 게임, 영화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치 영역에도 세계관의 ‘홍수’가 밀어닥쳤습니다. 팬덤정치가 유행입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팬덤은 자기들만의 세계관으로 단단히 무장했습니다.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서사에 의존해 세상을 이해하고 정치에 참여합니다.

다수가 동의하는 공통인식 사라져

한쪽에선 ‘좌파 세력이 사회를 장악했다’는 세계관을 신봉합니다. 이들의 눈에 대한민국은 ‘노조 천국’입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학생을 세뇌하고, 중국인이 댓글로 여론을 조작합니다. 국정농단의 증거로 제출된 태블릿피시는 가짜이고, 문재인 정권의 무능으로 코로나19 방역 ‘참사’가 벌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반대편 세계관 속에선 친일 적폐 세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검찰, 법원, 언론 등 일치단결한 기득권 세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마녀사냥’ 했다고 믿습니다. 포털 사이트의 알고리즘은 지독한 보수 편향입니다. 당내 성추행 사건은 사과해선 안 될 일이고, 선거 결과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입니다.

어떤 세계관에선 정권이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조작합니다. 다른 세계관에선 대선 개표 결과가 조작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성이 무임승차하고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는 나라이지만, 다른 이의 눈에는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이주민과 난민이 점령한 나라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도 <조선일보> 독자와 <한겨레> 독자의 관점은 달랐지요. 그러나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웃에게 이토록 강한 적개심을 표출할 정도로 서로 거리가 멀지는 않았습니다.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 속 서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차이를 예전처럼 ‘정치적 양극화’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충분하지 않아 보입니다. 멀어도 너무 멀어진 시민들은 이제 아예 서로 다른 가상 세계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의 메타버스(Metaverse) 속에 들어가 웅크려 있다고 할까요.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사회 구성원 다수가 동의하고 수용하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논쟁할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가상 세계로 흩어져 공통 가치를 잃어버릴 때, 논쟁과 대화를 포기하고 팬덤의 덩치를 키워 다수결 승부에서 이기는 데만 몰두할 때 민주주의는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팬덤 세계관에선 언론이 ‘빌런’

‘메타버스 정치’ 시대에는 언론도 위기에 처합니다. 팬덤정치의 세계관은 대체로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띱니다. 선과 악이 언제나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한 ‘히어로’ 정치인이 ‘아마겟돈’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외로운 싸움에 뛰어들지요. 여기서 언론은 이 히어로를 괴롭히는 ‘빌런’으로 등장합니다.

팬덤 시민들은 지지 정당이나 정치인이 실패하는 원인을 늘 불공정한 언론 탓으로 돌립니다. 무능과 과오가 있을 수 없는 히어로가 곤경에 처하면 ‘데우스엑스마키나’(고대 그리스의 연극무대 기법으로 기중기 등을 이용해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처럼 언론이 소환됩니다. 인정할 수 없는 탄핵도, 납득할 수 없는 대선 패배도, 모든 게 언론이 우리 편에 불리하게, 상대편에 유리하도록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언론은 현실 정합성이 떨어지는 팬덤 세계관의 오류를 은폐하기 위해 가장 자주 동원되는 알리바이입니다.

이런 플롯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요즘 정치인들은 언론을 핑계 삼아 잘못을 감추는 데 능숙합니다. 시대착오적 혐오발언 때문에 사퇴한 대통령실 비서관은 “언론인이 국민 생각을 왜곡시키고 저능아로 만든다”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부실한 준비로 망신을 당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조국 전 장관과 비교해서 언론 보도량이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라는 불만을 내비쳤습니다.

수많은 세계관이 공존하는 ‘멀티버스’의 파편화된 정치 환경에서 다수 시민의 신뢰를 받는 언론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세계관에서 ‘참언론’이 되는 순간 다른 모든 세계관에선 ‘가짜뉴스’가 되기 때문이지요. 한국 언론이 노골적 불신의 대상이 된 책임은 무엇보다 언론에 있습니다. 하지만 팬덤정치가 설정한 세계관의 덫에 빠진 것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최근 기자들을 상대로 빈번히 벌어지는 신상털기와 좌표찍기, 악성 댓글과 전자우편 등 디지털 괴롭힘은 세계관 속 ‘악의 축’인 언론을 응징하려는 팬덤 활동의 결과입니다. 세계관 ‘과몰입’이 현실 속 인권침해와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이런 팬덤정치 문제를 방치한 채 언론에 규범을 지키라는 도덕적 훈수만 반복하는 비평은 무책임합니다. 언론학자와 시민사회도 팬덤정치에 결박당한 언론의 딜레마에 주목하고 해법을 고민할 때입니다.

언론이 피해자를 자처하며 억울함만 호소하는 것도 민망한 일입니다. 팬덤정치에 언론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영논리에 따라 현실과 판타지를 자기 마음대로 버무려 정치 팬덤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건 유튜브, 팟캐스트, 소셜미디어의 유사 언론인들입니다.

유사언론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나

하지만 이들에 앞서 세상을 진영논리로 바라본 건 기성 언론입니다. 가상 세계의 창조주들에게 진영논리가 돈벌이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 것도 언론입니다. 지금도 많은 언론이 유사 언론인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진영논리에 중독돼 있습니다. 언론마저 팬덤 시민들을 알리바이 삼아 면죄부를 받으려 해선 안 됩니다.

언론부터 정파성의 유혹을 뿌리치는 게 급선무입니다. 드워킨의 말대로 대립과 갈등 대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공적 이슈를 놓고 벌이는 토론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한다면, 무엇보다 이 과정을 매개하는 공정한 언론이 존재해야 합니다. 언론이 도망치거나 편승하지 말고 팬덤정치를 극복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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