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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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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동해안으로 향하면 ‘다행’?

‘전국’ 신문 ‘전국’ 방송이라지만 실상은 ‘서울’ 신문 ‘서울’ 방송
등록 2022-10-16 17:59 수정 2022-10-18 11:43
2022년 9월23일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에 있는 풀빌라. 태풍이 지나간 뒤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한겨레 자료

2022년 9월23일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에 있는 풀빌라. 태풍이 지나간 뒤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한겨레 자료

2022년 9월 ‘역대급’일 거라 예상했던 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뒤 일부 누리꾼이 음모론을 제기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에 불리한 이슈를 덮으려 언론이 별거 아닌 태풍을 놓고 ‘초대형’이라는 호들갑을 떨었다는 겁니다. 재난 대응은 지나친 것이 모자란 것보다 백배 낫다는 점에서 ‘호들갑’이라는 진단에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이런 시각에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유기된 지역 언론

힌남노가 ‘별거 아니’라는 말은 태풍의 직격탄을 맞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경북 포항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벌어진 비극에서 보듯,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곳의 피해는 컸습니다. 이런 음모론에는 자기 주변에서 피해가 보이지 않으면 ‘없는 일’이라 여기는 ‘특별시’ 거주민의 지독한 ‘서울 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서울에 쏟아진 폭우를 놓고 포항 분들이 ‘별일 아니’라고 한다면 서울 주민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욕을 먹어도 언론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동안 지역을 외면한 보도를 해오며 서울 중심주의를 부추긴 주범이 바로 언론이기 때문입니다. ‘전국’ 신문, ‘전국’ 방송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서울 사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하는 ‘서울’ 신문과 ‘서울’ 방송입니다. 다른 지역 소식은 양념처럼 조금 곁들일 뿐이지요.

서울에 영향이 없으면 재난 주관 방송사조차 재난 방송을 하지 않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입니다. 태풍이 서울로 오다 경로를 틀어 동해안으로 향하면 “다행”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행태도 여전합니다. 지역이 소멸 위기에 처했다고 경고하는 보도가 나오지만, 보기 좋은 일회용 기획 아이템으로 소비할 뿐 꾸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건 서울 사람, 서울 언론만 서울 중심주의에 빠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도 ‘지역’은 없습니다. 지역민들조차 대통령과 국회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만 바라볼 뿐 지역 이슈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역 현안의 해법도 오직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에서 출세한 ‘개천 용’을 통해 각종 이권과 허가를 더 많이 따내는 데 머물러 있지요.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지만, 더 빠르게 소멸하는 건 지역 언론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언론계에서 자주 쓰는 말이 ‘뉴스 사막’입니다. 종이신문 퇴조와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역 기반 언론사가 줄줄이 문을 닫는 바람에 지역 뉴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커뮤니티가 늘어났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건 그나마 지역마다 하나씩 제대로 된 신문이 살아 있던 미국의 배부른 걱정입니다. 한국은 지역 뉴스와 관련해선 이미 광활한 사막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 지역 언론은 열악한 처지로 사실상 ‘유기’된 상태입니다. 지역 주민의 관심은 떠났고 디지털 전환에는 실패했습니다. 지역 주민도 지역방송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는 외면하고 동네 이슈를 다루는 지역신문을 구독하지 않습니다. 공적 지원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2005년 250억원 규모로 조성된 지역신문발전기금은 매해 예산이 축소돼 2022년엔 80억원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지역 언론들 ‘연횡’이 아니라 ‘합종’을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다보니 지역 문화와 여론을 조성하는 지역 언론의 본령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집니다. 언론윤리를 내버리고 지방자치단체나 기업과 유착하는 사례가 늘어납니다. 포털사이트가 지역 언론 몫으로 할당한 ‘1도 1사’ 제휴 매체 자리를 놓고 지역 언론끼리 치고받고 싸우기도 합니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일하는 지역 언론인이 많지만, 이들의 피와 땀은 좀처럼 눈에 보이는 결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소멸 위기에 내몰린 지역과 지역 언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중국 전국시대의 외교 전략인 ‘합종연횡’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종’은 초강대국 진나라에 맞서 힘없는 나머지 여섯 나라가 뭉쳐야 한다는 논리이고 ‘연횡’은 여섯 나라를 ‘갈라치기’ 해서 진나라와 일대일로 교섭하게 하는 전략이지요.

처음 여섯 나라는 힘을 합쳐 진나라에 맞섰지만, 나중엔 ‘약한 나라들과 손잡지 말고 강한 진나라의 보호를 받으라’는 꼬임에 넘어가 하나둘 동맹을 깨고 진나라와 화친을 맺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여섯 나라는 진나라에 하나씩 잡아먹히고 천하는 진나라에 의해 통일됩니다.

힘센 진나라가 서울이고 힘없는 여섯 나라는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지금 모든 지역은 서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시혜성 예산과 지원을 끌어와 살아남겠다는 ‘연횡’의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째 애타게 서울만 바라보며 발전을 기다린 ‘짝사랑’의 결과는 어떤가요?

발상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지역에 필요한 건 ‘연횡’이 아니라 ‘합종’입니다.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힘을 합쳐 서울에 맞서야 합니다. 지역끼리 서로 빼앗으려 하지 말고 힘을 모아 서울이 독점하는 자원을 빼앗아와야 합니다. 지역이 각자도생의 관성을 버리고 하나로 뭉치지 않으면 지역 공멸이라는 ‘예정된 결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밀양·당진·횡성의 주민들이여, 연대하자

서울로부터 차별과 착취를 당한다는 점에서 모든 지역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이 연대의 구심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초고압 송전탑 건설로 재산권과 건강권을 침해당하는 경남 밀양, 충남 당진, 강원도 횡성의 주민들은 아픔을 공유합니다. 혼자서는 약하지만 같은 아픔을 가진 지역들이 어깨동무하면 서울을 움직여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역 언론이 지역 시민사회 간 연대의 매개체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지역 언론들끼리 나누고 도우며 튼튼한 네트워크를 맺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역 언론은 눈앞의 작은 이권을 우리 지역으로 끌어오겠다고 아우성치는 지역 이기주의 언론이 아닙니다. 서울과 지역 간 수직적 차별에 맞서고 지역과 지역 간 수평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언론입니다. 풀뿌리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풀뿌리 언론도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업에서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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