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취임 두 달 만에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지지율 폭락의 원인을 ‘도어스테핑’(Doorstepping)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도어스테핑은 윤 대통령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출근길에 기자들의 간단한 질문에 답하는 ‘약식 회견’이나 ‘즉석 문답’을 말하지요.
“대통령을 처음 해봐서” “과거에는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나”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느냐” 같은 ‘어록’이 이 자리에서 탄생했습니다. 대통령실이 코로나19 확산을 핑계로 약식 회견을 잠시 중단했던 해프닝도 대통령의 ‘입’이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윤 대통령의 약식 회견에 도어스테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잘못입니다. 본래 도어스테핑은 인터뷰를 꺼리는 취재원의 집으로 찾아가 문간(Doorstep)에서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자의 취재 방식을 일컫는 거지 대통령의 행위를 이르는 용어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를 쓸 이유도 없습니다. 적절한 우리말 표현으로 바꿔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국립국어원은 도어스테핑을 대체할 말로 ‘출근길 문답’ ‘약식 문답’을 선정했습니다.)
이름은 잘못됐지만, 출근길 약식 회견이라는 새로운 소통 방식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국가 정상 가운데 한국의 대통령만큼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는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연례행사에 가깝습니다. 회견하더라도 질문자, 질문의 개수와 주제 등을 미리 협의하고 정해진 순서와 각본에 따라 벌이는 ‘퍼포먼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선출된 대표는 주권자인 국민의 질문에 응답하고 국정에 관해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국정 최고책임자가 어떤 생각으로 국정에 임하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안보나 경호상의 사정만 없다면 권력은 투명하게 공개될수록 좋습니다.
생업에 바쁜 국민이 직접 나설 수 없다면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이 대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영국 총리는 매주 수요일 의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응답합니다. ‘총리에게 던지는 질문’(Prime Minister’s Question)이라는 이름의 정례행사입니다. 총리와 야당 대표가 다양한 국정 현안을 놓고 벌이는 날카로운 설전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생중계됩니다.
국민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언론도 질문을 던집니다.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의 제임스 브래디 룸에서 빈번하게 브리핑하고, 전용 헬기를 타러 가는 길에 잔디밭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총리도 각각 다우닝가와 나가타초의 관저 앞에서 수시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게 관례입니다.
윤 대통령이 선진국을 본받아 아침마다 각본 없이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소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른 중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취재진과 상시로 소통한다는 형식에만 의미를 두고 끝내선 안 됩니다. 소통의 질과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고위공직자라면 취재진 앞에 서야 하는 문화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약식 회견은 정제되지 않은 즉흥적 답변으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주무장관이 ‘주 52시간 근무’ 제도 개편 관련 브리핑을 한 다음날 “보고받지 못했다”며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말한 게 대표적입니다. 대통령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회견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날것 그대로’의 소통을 주문할 때 ‘날것’은 꾸미지 않은 모습을 말하지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각본이 없다고 준비까지 없어선 곤란합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갖는 무게는 엄청납니다. 주가를 요동치게 할 수도 있고 외교관계를 경색시킬 수도 있습니다. 언론 앞의 대통령은 늘 국정 현안을 숙지한 상태에서 정교하게 관리된 메시지를 내보내야 합니다. 국민과 소통하기 전에 정부와 대통령실 내부에서 훨씬 긴밀한 소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자리가 돼서도 곤란합니다. 윤 대통령은 거북한 질문을 받으면 역정을 내거나 아예 답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아침마다 기자들 만나는 걸 낙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기자를 적대시하지 않는 건 다행스럽지만, 언론 인터뷰는 대통령의 취미생활이나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공직자의 의무입니다. 불편한 질문일수록 성실히 답하는 게 약식 회견의 취지에 맞습니다.
윤 대통령의 실험을 계기로 약식 회견이 당연한 관례로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부라사가리’(‘매달리기’란 뜻의 일본말)라는 일본 총리의 약식 회견도 처음부터 당연했던 게 아닙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정례화한 겁니다. 정치적으로 득실을 따져 내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하는 게 아니라, 고위공직자라면 좋든 싫든 취재진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합니다.
논란이 된다고 약식 회견을 없애거나 질문 개수를 줄이는 건 퇴행입니다.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실언할까봐 우려된다면 질문을 덜 받을 게 아니라, 대통령이 답변을 잘하도록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면 운전자의 주의 미숙을 탓할 일이지, 자동차라는 교통수단이 문제라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약식 회견에는 죄가 없습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진보 성향 시민들 사이에서 약식 회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높습니다(진보층에서 반대 63.0%, 보수층에서 찬성 63.2%). 그러나 약식 회견의 가치는 지금 대통령이 누구인지, 내가 대통령을 좋아하는지와 분리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운전자가 밉더라도 자동차를 반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파심에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약식 회견을 한다는 핑계로 정식 기자회견을 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장관 임명 여부 등 ‘예스’와 ‘노’로 대답 가능한 이슈 정도는 약식 회견에서 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 복지, 부동산,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한 심도 있는 문답을 출근길 짧은 시간에 주고받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정책 지향을 따지는 긴 호흡의 기자회견 자리도 자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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