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전 국민이 전문가이고 해설가인 분야가 두 군데 있다고 하는데, 바로 축구와 정치입니다. 입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한마디씩 던지니 축구선수와 정치인은 늘 ‘욕받이’ 신세입니다. 온 국민이 경쟁자인 직업 해설가와 평론가도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는 ‘범국민 전문 영역’에 언론이 추가됐습니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언론 비평이 넘쳐납니다. 중학교 2학년만 돼도 뉴스가 곧 진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기레기’라는 멸칭이 보통명사가 될 만큼 언론을 향한 적대 담론이 늘어난 부작용도 있습니다.
시민과 언론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일차적 책임은 언론에 있습니다. 뉴스를 이용하는 시민은 언론의 ‘존재 이유’건만, 언론은 그간 이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언론이 궁금해했던 건 독자가 아니라 권력을 지닌 취재원이었습니다. 감시를 위해 가까이 갔다가 권력의 후광에 눈이 부신 나머지 본분을 잊어버린 게지요.
기자는 취재원에게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시민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기자는 권력자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시민의 비판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자는 ‘내로남불의 아이콘’이 됐고, 소통을 포기한 언론은 고립된 섬이 됐습니다.
언론을 향한 시민의 비판이 모두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언론 내부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의 지적에는 오해나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지요(순전히 기자를 괴롭히기 위한 악의적 공격이나 성희롱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민의 쓴소리에 일부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내쳐선 안 됩니다. 그 안에 언론에 약이 되는 소중한 정보가 있으니까요. 기자도 출입처 사정을 100%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관계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비판 대상이 아예 귀를 닫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남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직업일수록 자신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뉴스는 전문가가 알아서 만들 테니, 문외한은 조용히 보기만 하라’는 오만한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기자는 기사로만 말한다’는 얘기도 옛말입니다. 알릴 건 적극적으로 알리고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합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축구선수와 정치인도 자신을 욕하는 대중과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 기자의 핵심 업무는 경청과 대화, 협력입니다.
언론만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모든 언론 비평은 언론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서 끝납니다. 시민의 문제를 언급하는 건 철저히 금기시돼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과 언론이 차갑게 등 돌린 지금 상황에 시민의 책임은 전혀 없을까요? 언론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건 맞지만, 시민사회도 신성불가침일 순 없습니다.
시민에게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는 게 엘리트주의가 아닙니다. 시민이 무오류의 존재인 것처럼 무조건 떠받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엘리트주의입니다. 성찰을 통해 한층 더 이성적인 존재로 거듭날 시민의 가능성을 부정하니까요. 시민에게 아첨해 눈과 귀를 가리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게 ‘시민의 편’을 가장한 엘리트주의자들의 수법이지요.
한밤중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는 취객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열쇠는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잃어버렸지만, 어두워서 찾기 힘들다며 엉뚱한 가로등 밑만 열심히 뒤지는 사람의 우화 말입니다. 언론을 바꾸겠다는 우리가 혹시 이런 상황 아닐까요? 시민을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로 언론만 다그쳐선 영원히 해결책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시민의 문제를 똑바로 바라볼 때입니다.
대한민국에 좋은 언론이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불편한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뉴스 이용자들이 좋은 언론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민이 사실에 근거한 뉴스보다 자신의 확증편향에 부합하는 뉴스를 원합니다. 권력의 ‘감시견’보다 자기 진영의 ‘반려견’이나 상대 진영을 물어뜯는 ‘투견’을 원합니다. 언론사가 애써 준비한 탐사기획 보도는 외면한 채 선정적인 속보만 클릭하면서 ‘좋은 뉴스가 없다’고 말합니다.
언론이 다루는 현실은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와 다릅니다. 명쾌한 선악의 이분법 위에서 싸우다 끝내 정의가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논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거악을 징벌하자고 목청을 높이는 뉴스는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입니다. 뉴스 속에선 사실을 찾아야지, 카타르시스를 찾아선 안 됩니다. 좋은 언론은 정의감 넘치는 시민이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시민들의 사회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언론이 있습니다. 나쁜 뉴스가 좋은 뉴스를 밀어내는 열악한 뉴스 유통 환경에서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좋은 언론을 알아보는 눈 밝은 시민을 키워내기 위해 늘 거론되는 해법이 미디어 리터러시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중요하고 더 확대돼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잘못된 자세로 운동을 배우면 열심히 할수록 몸이 망가지듯, 비뚤어진 시각으로 지식을 쌓으면 언론을 혐오하기 위한 재료만 늘어날 뿐입니다. 진영 논리로 언론을 도구화하는 왜곡된 시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 글을 끝으로 2년간 이어온 ‘고구마 언론 비평’의 문을 닫습니다. 시민과 언론 사이를 이간질하는 정치인과 유사 언론인의 틈바구니에서, 언론 전체를 싸잡아 욕하는 ‘사이다’ 비평의 홍수 속에서 이 칼럼의 목표는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민과 언론을 조금이나마 화해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서로를 ‘뿔 달린 괴물’로 보는 시민과 언론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만들진 못했더라도 작은 징검돌 하나를 놓았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시민과 언론은 경쟁자나 적대자 관계가 아닙니다. 둘의 이익이 제로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좋으면 시민에게도 좋고, 시민에 도움이 되는 건 언론에도 도움이 됩니다. 시민과 언론은 민주주의를 함께 가꿔나가는 파트너 관계입니다. 언론이 권력 아닌 시민을 새로운 파트너로 기꺼이 받아들일 날을 기다리며 독자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좋은 언론의 벗으로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을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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