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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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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포퓰리스트의 혀가 칼이 될 때

‘객관주의’의 뒤에 숨은 따옴표 저널리즘, 혐오 표현 확산하는 민주주의의 공적
등록 2022-04-13 13:08 수정 2022-04-14 02:33
2019년 영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 에피소드 5편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 비비언 룩(가운데)이 연설한 뒤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장면. 왓챠 제공

2019년 영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 에피소드 5편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 비비언 룩(가운데)이 연설한 뒤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장면. 왓챠 제공

“당신은 국민의 적이다.”(You are the enemy of the people.)

2019년 방영한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에 나오는 정치인 비비언 룩의 대사입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사람들이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말을 속 시원히 해주는 ‘사이다’ 언변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관해 물으면 “우리 집 앞 쓰레기만 잘 치워주면 그런 거엔 관심 없다”고 내뱉고, 아이큐 70 이하 시민의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열광적 지지로 총리 자리에 오른 비비언 룩은 본격적으로 ‘국민의 적’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난민을 수용소에 가두고 빈민 지역 거주민의 이동을 제한합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은 ‘가짜 뉴스’로 매도합니다. 약자를 혐오하는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표를 얻는 극우 포퓰리스트 비비언 룩은 성별만 바뀐 ‘영국의 트럼프’처럼 보입니다.

이준석의 ‘나쁜 정치’와 디스토피아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드라마 속 암울한 풍경에 눈길이 가는 건 그 안에 지금 우리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집권 여당이 될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행보에 비비언 룩의 모습이 겹쳐 보이니까요. 이 대표는 늘 ‘선량한 국민’과 ‘부도덕한 국민의 적’을 이분법으로 갈라칩니다.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한다고 몰아붙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내 일상의 불편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소시민의 감정에 호소합니다.

차별과 배제를 원하는 대중의 뒤틀린 욕망을 자극해 표를 챙기는 이준석 대표는 ‘한국의 트럼프’가 될 위험성이 있는 포퓰리스트입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이런 혐오 정치가 성공하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됩니다. 정파와 진영을 떠나 모든 양심적 정치세력이 연대해 ‘나쁜 정치’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언론은 이준석 대표의 ‘나쁜 정치’를 제대로 다루고 있을까요? 극우 포퓰리즘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복어처럼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포털에서 보는 대다수 뉴스는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비난하는 이 대표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그대로 인용해 전하는 ‘따옴표 저널리즘’에 그치고 있습니다. 혐오 표현을 확대 재생산하고 편 가르기 전략에 이용당하는 최악의 방식입니다.

이런 기사를 쓴 언론은 “이 대표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 아니냐”고 반문할 겁니다. 발생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으니 객관주의 원칙에 비춰 아무 문제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객관주의는 때로 언론이 민감한 주제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됩니다. 혐오의 언어에 마이크를 갖다대서 발언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스피커 구실을 해놓고선 객관적 보도를 했다는 알리바이 뒤에 숨는 거지요.

이 대표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고 아예 보도하지 않는 건 어떨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집권당 대표는 시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자리입니다. 언론이 다루지 않는다고 그의 권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하거나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럼 언론은 이 대표의 정치를 도대체 어떻게 보도해야 할까요?

2022년 3월28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비난하고 있다. YTN 뉴스 갈무리

2022년 3월28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비난하고 있다. YTN 뉴스 갈무리

팩트 넘어 시시비비 가려야

스티븐 워드 미국 위스콘신대 명예교수는 포퓰리즘 시대에 언론이 ‘사실의 속기사’가 돼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팩트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중립적 저널리즘을 탈피해 포퓰리스트의 거짓과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취재는 당연히 객관적으로 해야 하지만, 보도할 때는 적극적인 가치 판단을 통해 ‘팩트를 넘어선 저널리즘’(Journalism Beyond Facts)을 구현해야 합니다. 판사가 불편부당한 법 논리를 적용하되 최종적으로는 원고와 피고 중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파주의의 전도사’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워드 교수는 언론이 현실에 개입할 때 기준은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객관주의 이데올로기보다 언론에 중요한 게 민주주의입니다. 자유로운 언론의 모든 권리는 민주주의로부터 나옵니다. 언론 없이 민주주의가 없지만, 민주주의 없이 언론도 없습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오염시킬 때 민주주의를 지킬 책임은 언론에 있습니다. 실제 트럼프 시대 미국 정론지들은 워드 교수가 말한 ‘민주주의를 위해 현실에 관여하는 저널리즘’에 앞장섰습니다.

민주주의, 공동체, 언론의 자유

워드 교수의 조언을 따른다면, 언론이 이 대표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를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 해답은 명쾌합니다. 이 대표의 발언을 전하되,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시시비비를 가려 비판해야 합니다. 이 대표의 언행이 왜 혐오이고 왜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지 명백히 알려야 합니다.

장애인 단체의 시위가 ‘비문명적’이라는 이 대표의 주장을 전하되, 사실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었던 우리 사회가 ‘비문명적’이었음을 함께 지적해야 합니다. 할머니 임종을 지키러 가야 한다는 시민에게 장애인 단체 대표가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답한 영상을 이 대표가 공유했다는 소식을 전하되, 이것이 뒷부분을 잘라낸 영상이라는 사실도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이 대표를 다룰 때만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닙니다. 고개를 들기 시작한 극우 포퓰리즘은 앞으로 독버섯처럼 늘어날 겁니다. 여기에 안일하게 대응한다면 결국엔 언론이 공격 대상이 될 겁니다. 비비언 룩이 “국민의 적”이라고 비난했던 상대는 다름 아닌 기자였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의혹을 캐묻는 기자에게 비비언 룩 총리는 “이러니까 언론이 망하는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그리고 끝내 공영방송 를 없애버립니다.

포퓰리즘 지도자와 지지자들은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외국 사례를 보면 포퓰리즘 정권에서 언론은 권력의 탄압과 대중의 공격에 시달립니다. 중립과 균형의 도그마에 빠져 포퓰리즘의 확산을 방치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외면한 언론은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셈입니다. 포퓰리스트의 혀가 칼이 되어 자신을 향할 때 후회하면 늦습니다. 극우 포퓰리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공동체를, 그리고 언론을 지키려면 바로 지금 싸워야 합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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