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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다’는 있었지만 ‘어떻게’는 없었다

박경석의 “지난 21년간 장애인 문제를 회피해온 정치권” 말에 살펴본 장애인 관련 입법
등록 2022-04-14 16:22 수정 2022-04-15 02:25
탈시설 장애인이 2021년 경기도의 한 장애인 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탈시설 장애인이 2021년 경기도의 한 장애인 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지금까지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달라고 했을 때 보장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애인도 교육받고 싶다고 했을 때 교육받지 말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하겠다, 하겠다, 하겠다고 했고 그게 2001년도입니다.”

“지난 21년간 장애인 문제를 회피해온 정치권”이라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의 말이 며칠 동안 목의 가시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21년이라는 압도적 시간에 놀랐고, 그래도 저상버스나 장애인 콜택시가 도입되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도 생겼으니 세상이 조금 나아진 것 아닌가 싶어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며칠 마음이 괴로웠던 건 놀람과 의아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 21년 중 국회에서의 나의 10여 년 시간을 포개어봤다. 국회 안팎에서 직간접적으로 마주친 박경석 대표와 장애인 당사자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정치권’을 호명했으니 나도 저 끄트머리쯤에서 불려나왔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21년

21년 중 내가 보고 겪은 10여 년의 시간을 복기해보니 정말 그랬다. 정치권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의지적 미래형으로 ‘하겠다’고만 했지, 어떻게 ‘했다’라는 현재 완료형으로는 한 번도 답한 적 없었다. 모두가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장애인의 전쟁 같은 일상에 참전한 사람은 없었다. 차별받는 장애인의 현실에 공감은 했을지언정 그 차별을 시정하려는 싸움은 외면했다. 생존에 대한 투쟁에 ‘지당하신 말씀’만 늘어놓았다. 정치권의 진짜 잘못은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감시 없는 집에서 편한 잠을 자고,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고, 생계를 유지할 노동을 할 실물적 삶의 현재성을 박탈한 것에 있다.

모두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았을 때 이들이 낸 용기란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었을 것이다(홍은전, 2020). 21년, 7600여 일의 하루하루를 그제야 가늠해본다.

사실, 해마다 돌아오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를 해본 의원실 보좌관들은 안다. 국회 예산 심사 시기가 되면 장애인 단체에서 장애인 활동지원, 탈시설 지원,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지원, 장애인 권익옹호기관 운영지원 등에 필요한 예산을 증액해달라는 요구가 온다. 그러면 장애인권에 의지가 있는 몇몇 의원실에서 그 증액 요구안을 받아 수정 요구안을 제출한다. 그 후 예결위 계수조정위원회에서 증·감액 심사를 하고 나면, 장애인 단체에서 요구한 증액 요구안은 거의 다 깎인 채로 다시 돌아온다. 이런 반복이 벌써 몇 해째다.

국회 안에서의 예산 심사가 비슷한 패턴을 겪는다면 국회 밖 장애인들의 이동권 싸움 또한 비슷한 패턴인 듯 보였다. 내가 대학생일 때 저상버스 도입을 위한 장애인들의 버스 타기 시위에 몇 차례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몇 가지 사회 경험을 하다 국회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장애인들은 여전히 버스 타기, 지하철 타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장애인 이동권이 한 치 앞도 못 나가게 전 사회가 막는 동안 나는 한편으론 그래도 좋아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근거 없이 낙관했고, 다른 한편으론 이동할 권리를 위해 인생의 시간을 다 거는 사람들의 삶에 무뎌지기만 했다.

마치 다 된 줄 착각했던 저상버스 보급률은 30% 미만에 그쳤고, 장애인 콜택시 한 번 이용하려면 대기시간 2시간이 넘어갔으며, 서울 지하철역 326개 중 21개 역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위험천만한 경사형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야 했다는 걸 이제야 다시 찾아보고 알았다.

위선하지 않으려다 놓친 최선

보좌관으로 살면서 ‘적정한 책임’의 크기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된다. 내가 국회에서 풀어가야 할 일이 너무도 절박해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던 시기에는 내가 절박한 만큼 모든 것이 내 책임 같았다. 권한과 책임은 비례할 텐데 권한 있는 자가 책임지지 않는 오래된 정치 행태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 권한의 크기도 잘 몰랐던 터였을 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좀 쌓이면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태도는 상대에게 오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적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만 앞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상대에게 기대를 품게 하면 결국 시간과 마음 둘 다 빼앗는 일이지 않나 싶은 거다. 약자의 목소리를 아예 배제하는 것과 소통하되 결국은 해결 못하는 희망고문 중 누가 더 나쁜가. 나는 후자라고 봤다. 진보를 표방하는 집단 중 특히 그런 태도가 많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경계했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온 사회적 약자들을 테이블 앞에 마주했을 때, 그것이 아무리 선한 동기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내 마음을 앞세우지 말자, 지금 중요한 건 내 것과 우리 의원의 책임과 권한의 내용, 한계를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확인시켜주고 그래서 약자가 활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라도 더 늘리는 데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위선하지 않으려다 최선까지 놓아버린 건 아닌지 박경석 대표의 일갈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엇보다 우리는 솔루션 업체가 아니고 대의기관인데 대리해야 할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 말에 마이크를 대줘야 하는 것이 우리 의무인데, 이런 기본 중의 기본을 잃어버렸다. 보좌관 경력이 늘어도 날을 벼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어느새 최선과 차선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최악과 차악 중 최악은 아니라는 것에 안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결실을 만들고 행동해야 할 때

비슷한 반복인 듯 보였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으로 오히려 새로운 매듭점이 생겼다. 뒤늦은 각성이 국회에도 일어났다.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장애인권 4대 법안’(장애인 권리보장법·장애인 탈시설 지원법·장애인 평생교육법·장애인 특수교육법 개정안)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2022년 4월7일, 드디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차원에서 ‘장애인 권리보장 및 탈시설 지원 관련 법률안’의 공청회가 열렸다. 2021년 11월 논의될 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두지 못했던 법안들이 갑자기 잡힌 공청회를 시작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미 상정된 법안의 경우) 4월 국회에서 가급적이면 속도를 내서 전반기 국회에서 마무리 짓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장애인 단체들의 요구사항을 실현할 방법을 찾겠다”고 했으니 ‘정치권’ 모두가 이제 뱉은 말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다.

이 일련의 일 때문에 국민의 대리인은 뭐 하는 사람이어야 할지 헤매는 심정으로 사전까지 찾아봤다. 대표한다는 것(represent)은 수권자를 옹호하는 것(stand for), 수권자를 위해 말하는 것(speak for), 행동하는 것(act for)과 유의어로 표기돼 있다. 대표한다는 것은 편들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동권 투쟁을 하는 장애인들은 시혜를 권리의 언어로, 차별받는 피동의 상태를 저항하는 능동으로 바꿔낸 사람들이다. 당사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순간에 정치는 무슨 행동을 해야 하나. 지하철 공간에서 권리의 언어가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앙상해진 권리의 언어를 정당화해주고 혐오발언에는 준엄하게 같이 싸워주는, 그게 ‘정치권’이 가진 권한을 제대로 쓰는 옹호·말·행동이지 않을까.

우리는 싸우는 자들에게 빚졌다

장애인들의 저항 덕분에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기약 없는 약속 대신 제대로 대표한다는 것의 의미, 저항하는 자를 대리하려면 당연히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 마음만 앞세우는 태도는 경계하되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회수하면 안 된다는 것, 우리 사회는 싸우는 자들에게 빚졌으니 그 싸움에 함께하면서 위임받은 힘과 권위를 약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저항하는 사람들 곁에서, 행동으로 책임을 다하겠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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