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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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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 시민을 두려워하라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정쟁으로만 인식하는 정부, ‘탄소중립법’도 이러려고 만들었나는 탄식만
등록 2022-09-26 15:48 수정 2022-09-26 23:35
2022년 4월 스페인 마드리드 기후변화 시위에 참여한 ‘과학자반란’ 단체 활동가들을 경찰이 제압하고 있다. REUTERS

2022년 4월 스페인 마드리드 기후변화 시위에 참여한 ‘과학자반란’ 단체 활동가들을 경찰이 제압하고 있다. REUTERS

“우리는 정부가 화석연료 및 기타 산업에 의해 압박받고 뇌물을 받고 실패한 이념을 보호하고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에 보고서를 유출했습니다. 정부는 공식 보고서가 발표되기 전에 결론을 수정했습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기꺼이 불복종하고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과학자들의 보고서 유출 사건

2022년 4월, 전세계 과학자 1천여 명이 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과학자 멸종저항 단체 ‘과학자반란’(Scientists Rebellion)이다. 과학자들의 모임인 이 단체에는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 참여했던 과학자와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기후과학자도 있다.

이 소식을 처음 국내 뉴스에서 보고 누리집과 국제행동을 촉구하는 인터뷰를 찾아봤다. 위기를 먼저 본 자들의 지혜롭고 절박한 말이었다. 이들이 유출했다는 보고서는 국제기구 IPCC의 평가보고서인데, 이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서 정부간 협상의 근거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다. 우리가 잘 아는 2015년 파리협정과 1997년 교토의정서는 모두 이 평가보고서에 근거했다.

현재 IPCC는 제6차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과학자반란’ 단체는 그중 일부를 초안 단계에서 유출해버렸다. 결론이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초안의 핵심 내용이 삭제됐기 때문이다. 이들 단체는 “기업의 이익과 정치 엘리트들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후 보고서를 어떻게 약화(watered down)시켰는가”라고 지적하면서 다음 내용을 실례로 들었다.

-10년 내에 가스 및 석탄 발전소 폐쇄에 대한 언급이 없어졌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같이 이해관계에 있는 국가가 석탄발전소 폐쇄라는 문구를 제거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고 보고서 발간이 늦어진 것은 주로 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위 10% 계층의 책임에 대한 어조가 약해졌다. 유출된 보고서는 그들이 가장 가난한 하위 10% 계층보다 10배 더 오염시킨다고 지적했다.

-초안에서는 에너지 전환의 진행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로 ‘기득권’의 책임을 경고했으나 요약보고서에선 삭제됐다.

-임박한 기후위기를 지연시킬 주요 도구 중 하나인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MR online, 2022년 4월27일)(https://mronline.org/2022/04/27/how-the-corporate-interests-and-political-elites-watered-down-the-worlds-most-important-climate-report)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결국 IPCC 보고서는 쓴 것보다 쓰이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한 메시지가 돼버렸다. 쓰이지 않은 것에는 기업, 상류층, 기득권의 문제와 책임이 더 많이 강조돼 있었다. 그리고 참여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삭제를 통해 기득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정부는 2022년 8월30일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실무안을 공개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전력 수요를 예측하고 이에 따른 전력 설비와 전원 구성을 설계하는 중장기(15년) 계획으로, 2년마다 갱신된다. 이번 제10차 계획은 2022년부터 2036년까지의 계획인데 공개된 실무안에 따르면 2030년 발전량 비중은 원전 32.8%, 신재생에너지 21.5%, 석탄 21.2%로 설정됐다. 2021년 10월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2030 국가 온실가스감축 목표(NDC)’ 상향안에선 2030년 원전 비중을 23.9%로 설정하고 여기에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30.2%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전격적으로 원전 비중을 높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낮췄다. 보도자료를 보다가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라는 유명한 드라마 대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문제는 전세계가 재생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하는 움직임과 대조해, 한국의 재생에너지 보급은 평균에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단법인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영국에 기반을 둔 국제 에너지 연구기관 엠버(EMBER)는 최근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현황과 주요 수출 부문의 탄소집약적 8개 기업의 글로벌 에너지 소비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 SK하이닉스·삼성전자·LG디스플레이·현대제철·현대자동차·포스코·삼성SDI·LG전자 이 8개 기업은 2020년 기준 국내외에서 총 83.9테라와트시(TWh)를 소비했다. 이는 2020년 21.4TWh에 불과한 한국의 풍력·태양광 발전량보다 약 4배 많은 전력 소비량이다.(그림 참조)

이뿐만 아니라 아시아 주변 국가인 일본·중국·몽골·베트남을 비롯해 전세계 풍력·태양광의 발전 비중이 처음으로 평균 10%를 넘어선 것에 견줘, 2021년 한국의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그 절반도 안 되는 4.7%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2022년 9월15일 삼성전자는 RE100(사용 전력 전부를 재생에너지로 전환) 가입을 대대적으로 선언했다. 그것도 국회에서 삼성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여러 차례 부르고, 약속을 받아내고, 이행을 촉구해서 어렵사리 만들어진 결과다. 그런데 재생에너지 생산량이 이 정도라면 탄소중립을 이행하고 싶어도 재생에너지 공급량이 모자라서 못할 지경이다.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과제를 이전 정부에 대한 정쟁으로만 인식하는 현 정부가 결국은 애먼 1등 기업의 발목을 잡게 된 아이러니. 전 정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겠다.

기후위기는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부터 위협한다. 서울 신림동 반지하 건물 주차장이 비에 잠긴 모습. 박승화 기자

기후위기는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부터 위협한다. 서울 신림동 반지하 건물 주차장이 비에 잠긴 모습. 박승화 기자

이러려고 탄소중립법 만들었나

제1388호 ‘북극곰과 에코백이 가리는 세계(https://h21.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1217.html)에서 쓴 것과 같이, 2021년에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 제24조에 ‘온실가스감축인지 예산제도’도 넣어놨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서를 작성할 때 단순히 금액 편성뿐만 아니라 그 예산집행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서 국가와 지자체의 재정 운용에 반영하도록 하는 안이다. 2022년은 법 통과 뒤 처음 시행되는 해다. 2023년 예산에 대한 ‘온실가스감축인지 기금운용계획서’가 국회에 도착했다.

나는 탄소중립법을 자식처럼 생각하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그 자식의 친구쯤 되는 기금운용계획서를 슬렁슬렁 봤는데 좀 이상했다. 예산서 작성 대상이 되는 13개 부처 288개 사업 중 취약계층지원사업은 저소득층 가구에 냉·난방기기를 지급하는 ‘저소득층 에너지효율 개선’ 사업을 포함한 5개가 전부였다. 규모도 전체 예산(11조8828억원)과 비교해 0.96%에 불과했다. 이러려고 탄소중립법을 만들었나 싶은 탄식이 나왔다. 역시 아무리 법에 영혼을 담아도 디테일에 반드시 악마가 있으니, 감시하지 않으면 도처의 악마에게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형국이다.

기후위기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목숨부터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은 몇 차례 경험으로 슬픈 상식이 됐다. 지난 집중호우 때 우리 모두가 아프게 목격한 서울 신림동 반지하 세 가족의 죽음도 그러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인프라가 50~100년 빈도의 강우량에 맞게 설계됐는데, 이번 중부지방의 집중호우는 150년 빈도였고 2020년 섬진강 유역의 홍수는 500년 빈도였다. 속수무책, 문자 그대로 두 손 묶여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밖엔 안 된다.

탄소중립법의 가장 중요한 취지는, 온실가스 감축 정책은 역진(逆進)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과 정부가 기후위기에 취약한 계층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도록 지원 대책과 재난 대비 역량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잘못 가면 국회가 더 감시해야 할 일이다. 눈에 힘주고 도처의 악마를 찾아내야겠다.

거리의 시민이 기후정의를 앞당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소개한 과학자반란에서는 그들의 소식지의 한 부분 ‘과학자들이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행동으로, 우리는 우리가 기후위기를 얼마나 두려워하는가뿐만 아니라, 얼마나 대규모, 세계적인 시민저항이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지를 세계에 보여줄 것이다.”

2022년 9월24일, 기후정의행진의 날에 모두 거리로 나가자. 기득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참여민주주의로, 쓰이지 않은 진실을 목소리로 쓰자.

이보라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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